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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가는대로 Jan 19. 2024

연중 제3주일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중고등학교 다니던 시절에 부모님과 어르신들께 이런 말씀을 많이 들었던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공부만 하면 된다. 대학 가면 다 할 수 있다. ” 그런데 대학에 가고 나서 보니 또 다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대학생으로서 해야 할 일들이 또 새로 생겼기에 과거에 하지 못했던 일들에 시간을 투자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모든 일은 순서가 있고, 때가 있습니다. 때를 놓친다고 해서 그 일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경우가 많습니다. 가끔은 다시 할 수 없는 것도 있습니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면, 과거에 하고 싶었던 일들 중에 몇 가지는 늦게라도 해보았지만, 몇 가지는 하고자 하는 의지를 잃은 것도 있고, 어떤 것은 아직도 꼭 한번 하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사는 것도 있습니다. 조금 늦었지만 정말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한 것은 유학이었습니다. 여러 사정으로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바로 박사 과정 진학을 못하였고, 병역특례의 혜택을 고려해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에는 계속 공부를 조금 더 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남아있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박사 공부는 그냥 더 하고 싶은 것이었지, 제 인생 계획에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때가 왔습니다. 1990년대 말 아시아 경제 위기가 닥치면서 제가 하던 일을 회사에서 더 이상 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1년 반 정도 다른 일을 하면서 다시 박사를 해보자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미 네 식구가 된 가족들과 함께 유학을 결심합니다. 아내의 헌신이 있었기에 아이 둘과 함께 어렵게 학위 과정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덕분에 지금의 제가 있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처음의 때는 잡지 못했지만, 그다음에 주어진 때를 잘 잡았던 것 같습니다.


또 다른 예로 배낭여행이 있습니다. 제가 대학 시절 배낭여행이 막 알려지기 시작되었고, 많은 주변 사람들이 다녀왔습니다. 특히 4~5년 후배들은 거의 모두 다녀온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다녀왔습니다. 그 배낭여행을 저는 48살에 하게 되었습니다. 남들이 다 가는 유럽의 관광지는 아니었지만, 10여 kg의 배낭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 800km를 걸었습니다. 무엇을 먹을지, 어디에 묵을지도 모르고 그냥 길을 걸었습니다. 누구를 만날지 설레기도 했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결론은 참 잘 마쳤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하라고 하면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도 하고 싶었던 대로는 아니지만, 계획 없이 길에 나를 맡기는 경험은 정말 소중한 경험으로 남았습니다.


정말 늦게라도 때를 잡아서 다행이었습니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 마르코 1,15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제가 과거에 하지 못했던 것들은 때가 지나도 조금 어렵거나, 조금 다른 느낌일 수는 있어도 다음에 할 수 있었던 것들이나,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하느님의 때는 지나가면 잡을 수 없는 마지막 심판날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때가 찼다고 하셨지만, 그때와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곧 오시겠지만, 하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달라서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복음은 항상 준비하고 있으라고 합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합니다. 복음을 믿는 것은 머릿속으로 복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복음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때를 알면 잘 준비하고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때를 알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이 그 때라고 해도 후회하지 않도록 사는 법 밖에는 없는 것 같습니다.


묵상을 하거나, 삶을 고찰할 때 내게 3일만 남아 있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라는 주제를 접할 때가 있습니다. 사과나무를 심을까요?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저는 제게 3일만 남아 있다면,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 시간을 보내고 싶습니다. 이런저런 생각도 나누고, 같이 먹고 싶던 음식도 먹어보고, 같이 가고 싶었던 곳도 가보고 말입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삶을 돌아보면서 무엇을 후회할까요라고 물어보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충분히 누리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용서를 청하지 못함을, 용서하지 못함을, 더 많이 같이 하지 못함을,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이야기하지 못함을 후회한다고 합니다.


저도 이제 조금 더 복음을 살아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내일 저를 불러가신다면 아무런 후회 없이 기쁘게 감사합니다라고 대답할 자신은 없지만, 그 후회를 조금씩 줄이는 삶을 희망합니다. 앞만 보고 갈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가고 있는지, 지나온 길에서 누구와 어떤 관계를 맺었는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제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시간과 재능을 함께 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맙다고 더 자주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중요한 일을 하느라 가장 소중한 것을 잃지 않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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