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다르다는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가장 먼저 나시나요? 저는 다른 것이 틀린 것은 아니다는 말이 제일 먼저 생각이 납니다. 지난 시절에는 다름을 틀림으로 해석하면서 다름도 교정의 대상이 되기도 했었습니다만, 지금은 다름이 새로움의 시작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아직은 다름을 중립적으로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틀린 그림 찾기가 아니라 다른 그림 찾기가 되어야겠지요. 오늘 이야기는 다름이 틀림이 아니라는 것에서 시작했지만, 예수님은 정말 다르구나라는 생각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 마르코 1,22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는 소제목이 붙어 있습니다. 마귀마저 말씀으로 물리치시는 새로운 권위에 사람들은 놀랍니다. 그런데 제게는 예수님의 권위가 율법 학자들과는 다르다는 구절이 더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당시 율법 학자들은 성경 말씀을 해석하고, 율법에 맞춰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삶은 율법적이기는 하지만 존경받을 만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식은 가지고 있었으나, 그 지식이 삶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항상 옳은 말을 하지만, 왠지 얄미운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삶의 향기로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어떤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지를 전달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누구나 알고 있는 옳은 말은 하지만,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달랐습니다. 짧은 성경 구절에 모든 이야기를 담을 수는 없었겠지만 예수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세상의 것과는 달랐습니다. 많이 배웠거나, 가진 것이 많거나, 지위가 높거나, 때로는 단지 먼저 경험했거나 태어났다는 이유로 가지는 권위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함께 살아가는 삶이 주는 존경과 두려움에서 나오는 권위였습니다. 자신의 유불리가 전혀 개입하지 않고, 세상의 구원 즉 하느님과 인간과의 올바른 관계를 세우는 것만이 모든 언행의 기본이었기에, 우리가 세상에서 볼 수 없었던 권위를 가지고 계셨다고 생각합니다. 따르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예수님의 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진 것도 하나 없었습니다. 심지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시고, 하늘에 오르는 그 순간까지도 말입니다.
힘이라는 것을 단순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세상은 힘을 원합니다. 그 힘은 정말 육체적인 힘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돈일 수도, 자리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힘이 없으면, 힘 있는 사람 옆에 있고자 합니다. 그러곤 그 힘이 자신을 이롭게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권위는 세상의 약자를 향했고, 세상의 위선과 맞섰으며,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다리가 되셨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롭게 하는 권위였습니다. 덕분에 지금도 우리가 예수님의 길을 따라 걷고자 하는 것은 아닐까요.
저는 당신은 좀 달라요라는 말을 들으면 가끔은 긍정적인 느낌보다는 부정적인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름과 틀림에 대한 느낌이 섞여 있어서 일수도 있고, 다르고 싶지 않은 마음이 있어서 일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제는 좀 달라져야겠습니다. 다르다는 말에 긍정적인 느낌을 가져보려 합니다. 적절한 힘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그 힘이 제를 둘러싼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력을 미칠 수 있도록 말입니다. 함께 하면 슬픔에 위로가 되고, 기쁨이 더 커지고, 생각이 넓어지는 그렇게 같이 있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율법 학자들과는 다르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