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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가는대로 Feb 16. 2024

사순 제1주일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사순 시기가 또 돌아왔습니다. 사순 시기가 되면,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고, 우리의 죄를 통찰하고, 회개하며,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통해 아담의 불순종에서 시작된 원죄에서 구원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또한 사순시기는 공생활을 준비하기 위하여 40일간 광야에서 단식하며 기도하심을 기억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로마 군대에게 잡혀가기 직전에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홀로 피땀을 흘리며 기도하신 것과 같이 하느님과의 시간을 보내십니다. 하느님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는 할 수 없기에 간절한 기도가 있어야만 하지 않았나 합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에, 내가 몸과 마음을 하느님께로 향하는 것이 하느님과의 대화의 시작이 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치 하느님이 아무것도 모르고 계셔서 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바라는 일을 큰 소리로 하느님께 알려드리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 혼자 떠들던 나를 진정시키고, 하느님을 향해 마음을 열어놓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기도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광야는 하느님의 목소리로 가득 찬 곳이었나 봅니다. 그래서 세레자 요한도 예수님도 다른 방해 없이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 광야로 나간 것이 아닐까요?


성경에서는 광야에서 어떤 생활을, 어떤 기도를 하셨는지 자세히 기술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마르코 복음은 사탄의 유혹조차 그냥 담담히 유혹을 받으셨다고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사기들도 사탄의 유혹은 자세히 기술하지만, 광야에서 예수님이 어떤 기도를 하셨는지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단식을 하셨다는 것 이외는 말입니다. 공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하느님과 많은 이야기를 하셨을 텐데 기록이 없습니다. 아마도, 공생활 이전이라 예수님이 드러나지 않으셨고, 광야에 홀로 계셨기에 아무도 예수님의 행적을 알 길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공생활 중에 제자들에게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셨나 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광야에서 무슨 기도를 하셨을지 너무 궁금합니다.


광야를 묵상하다 보니, 6년 전에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이 생각납니다. 겨울 산티아고 길은 하느님과 함께 걷는 길이었습니다. 매일 2~30km를 걸어가는 동안 많아야 20여 명 정도의 사람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하루에 8~10시간을 걸으면, 그중 4~5시간은 혼자 길을 걸었습니다. 봄, 여름에는 앞사람 뒤통수를 보면서 길을 걷고,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데, 겨울의 산티아고 길은 하느님과 함께 걸어가는 시간이었습니다. 의도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들이 제게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어디로 가고 있냐고 묻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꾸준히 제게 지고 있는 십자가를 내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왜 당신이 지워준 십자가 말고, 다른 사람의 십자가도 매고 있냐고 하셨습니다. 누구나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는데, 왜 남의 십자가까지 지고 못 따라오고 있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 길은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길이었습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의 광야처럼 말입니다. 이집트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께만 의지하는 것을 배웠던 광야에서의 40년처럼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혼자인 줄 알았는데,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천사들이 시중을 들며 함께 있었음을 이제야 알았습니다. 여러 번 길을 잃을 때마다, 물어보기도 전에 누군가 길을 알려주고, 잃어버린 화살표를 발견하고, 혼자 걷던 길에 다른 순례자 나타났습니다. 길에 미끄러져 넘어져도 방금 전에 낀 장갑이, 어깨를 짓누르던 배낭이 저를 지켜주었습니다. 심한 근육통에 시달릴 때도 말도 통하지 않는 약사님이 제게 꼭 필요한 압박붕대를 건네주었습니다. 지쳐 쓰러지기 전에는 숙소가 나타났습니다. 모든 것이 제 곁에 같이 걸었던 천사의 도움이었다는 것을 오늘에야 깨닫습니다.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마르코 1,13


예수님 조차도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광야에서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셨습니다. 아무도 없이 비바람을 맞고 걸었던 산티아고 순례길도 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많은 사람과 함께 살아가면서도 사람의 온기를 그리워하며, 외로움을 느끼는 그 순간도 제 곁에는 당신이 항상 함께 계십니다. 닫힌 제 마음의 문 앞에서 항상 제가 마음의 문 열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냥 갑자기 힘이 납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집니다. 항상 저와 함께 하고 계심을 제가 다시 깨닫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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