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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가는대로 Feb 23. 2024

사순 제2주일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여러 기도들 중에 저는 십자가의 길 기도를 좋아합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머무셨던 33년, 공생활 3년 중에서 단 3일을 기억하는 기도입니다.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무덤에 묻히시기까지 수난하신 예수님이 가셨던 길을 뒤따라 걷는 기도입니다. 많은 기적을 행하시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셨지만,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없었다면, 그리스도교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구원도 없었겠지요. 여기에 한 가지 어릴 적 기억이 제게 십자가의 길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었습니다.


“베드로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마르코 9,6


오늘 복음에서 인간이 아닌 신의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아와 함께 하는 것을 본 베드로는 겁에 질려 무슨 말을 할지 몰랐습니다.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함께 지냈으면 좋겠다고 합니다. 상황에 전혀 맞지 않는 말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오랜 시간 함께 지내고 싶다는 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나중에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대학시절에 주일학교 교사를 6년간 했습니다. 교재에 따라 주일학교 수업을 열심히 준비했지만,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은 계획대로 잘 되지 않았었습니다. 며칠을 고민하고, 교구에서 나오는 교안을 참고하고, 동료 선생님들과 연습을 하였어도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은 항상 새로움이었습니다. 십자가의 길에 대한 특별한 기억도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중고등부 학생들과 2박 3일로 겨울 피정을 갔었는데, 제가 십자가의 길 기도를 담당하였습니다. 추운 겨울이라, 피정의 집 야외에 설치된 십자가의 길을 기도와 함께 걸어가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그래도 십자가의 길은 무난하게 잘 마쳤습니다. 그런데 파견 미사 강론 시간에 신부님께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마치고, 추위에 불평하는 학생들에게 제가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잠시 추위에 떨며 십자가의 길 기도를 했지만, 예수님은 아직도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계십니다.” 그리고 강론을 이어가셨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강론을 들으며, 제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었습니다. 저도 너무 춥고 힘들었다는 기억이었지, 무슨 말을 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 순간을 하느님께서 제 입을 통해서 말씀하셨다고 믿고 있습니다. 2000년 전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자가 위의 예수님께 못을 박았지만, 지금은 우리가 말과 행동으로 저지른 죄가 날카로운 못이 되어 예수님을 십자가에 계속 매달아 두고 있다고 말입니다. 진정한 통회와 회개로 이제 그만 십자가에서 내려달라고 말입니다. 제 입에서 나왔지만, 제가 준비하거나 생각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기억도 못하던 말입니다. 덕분에 십자가의 길 기도는 제게 특별한 기도가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 시대에 가장 똑똑한 사람을 제자로 택하신 것이 아니라,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모든 것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을 통해 하느님의 능력으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히 믿고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든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고, 내가 믿기만 하면 나를 통해 기적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사순시기는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하며, 회개하고, 죄를 끊어버리는 시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준비를 하시는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가장 잘 보내는 방법은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나는 앞세우고, 하느님 앞에서 변명을 하는 시간이 아니라, 나를 내려놓고 하느님께서 저를 통해 하느님의 일을 세상에서 하실 수 있도록 마음을 여는 사순시기가 되어야겠습니다. 내 안에 가득 차 있는 나를 잠시 내려놓고, 하느님 당신의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달라고 기도하신 프란치스코 성인은 되지 못하지만, 저를 당신의 작은 도구로 써주소서. 하늘의 태양은 못 되더라도 주위를 비추는 작은 등불이 되겠다는 성가처럼 가까운 제 옆을 비추는 작은 등불 되게 하소서. 제 지식과 경험이 아니라 당신의 사랑을 전하는 자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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