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
나이가 들면 현명해진다고 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면 고집이 세진다고 하기도 합니다. 현명한 것과 고집이 센 것이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요? 나이가 든다는 것을 지식과 경험이 쌓인다는 것으로 이야기할 때는 현명해진다고 할 수 있지만, 세상 모든 일을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만 판단한다면 고집이 세다고 하는 것은 아닐까요? 성공의 덫이라고 하는 것처럼, 성공했던 방식만을 고수하다 결국은 실패하고 마는 모습도 생각이 납니다.
“이 성전을 마흔여섯 해나 걸려 지었는데, 당신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는 말이오?” 요한 2,2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표징을 보여달라는 유대인들에게 성전을 허물면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때 유대인들의 답은 조롱에 가까웠습니다. 성전을 짓는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유대인들의 머리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대답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 순간에는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도 무슨 말인가 했을 것 같습니다. 아무도 이 말씀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신다고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가지고 있는 경험과 지식에 부활이 없었기에, 단순히 눈앞에 있는 건물을 생각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을 살고 있는 저라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제가 가진 경험과 지식이 저의 가치를 정하는 기준인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했던 적이 참 많았던 것을 보면 말입니다. 제 경험과 지식이 세상의 잣대가 되어 남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기준이 되었던 것입니다. 입으로는 “내가 어떻게 다 알겠어, 그건 몰라. “라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혼자만의 답을 가지고 남을 평가하기도 했던 것이 부끄럽습니다. 한편 저는 제 경험과 지식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면서도, 다른 사람이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저를 판단하면 그건 섣부른 판단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마음속 한구석에는 항상 제가 옳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 교만했습니다.
그러던 제가 조금씩 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너무나 빠르게 변한다는 것을 인지하면서 저를 제대로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일들이 제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면서, 능력의 한계를 몸으로 느끼면서 변해야 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다 안다고 했을 때는 의심의 눈초리로 저를 바라보던 사람들이 제가 모른다고 하니 도와주기 시작합니다. 저를 외롭게 하고, 지치게 했던 것이 다른 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저 스스로 만들어 놓은 벽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문을 꽁꽁 닫고, 커튼을 짙게 드리우고서는 다른 사람은 제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일 또한 그렇습니다. 제 경험과 지식 안에 하느님을 가두어 두면, 하느님께서는 제 경험과 지식 안에서만 활동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제 경험과 지식을 넘어서는 하느님을 인정하고, 마음을 너그럽게 가져야만 하느님께서 제 안에서 기적을 행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유대인들의 지식과 경험으로는 결코 성전을 사흘 안에 다시 지을 수는 없을 것처럼 말입니다.
갑자기 하늘나라는 어린이들의 것이라고 하신 말씀이 생각이 납니다. 아직 자신의 경험과 지식으로 편견을 만들지 않은 어린이들만이 하늘나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이었나 봅니다. 그러고 보니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도 그들의 편견 속에 그들만의 메시아를 가지고 있었기에 다른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 것은 아닐까요?
사순 제3주일을 지내면서 저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의 경험과 지식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함을 청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