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맘가는대로 Mar 22. 2024

주님 수난 성지 주일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

살다 보면 사람이 미울 때가 있습니다. 그냥 싫은 사람이 있습니다. 왜 그 사람이 싫으냐고 물으면,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이유조차 생각나지 않아서, 그냥 싫어요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이유를 물어보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언젠가부터 미워진 겁니다. 그다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것만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반대로 이유가 필요 없이 좋은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에 빠진 연인 사이가 그렇고, 부모의 입장에서는 아이들이 그렇습니다. 누가 봐도 이해가 안 가지만 그 사람 편을 듭니다. 눈에 콩깍지가 씌었다는 말이 딱 맞는 것 같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지 주일 복음은 듣고 또 들은 복음인데, 오늘 복음 말씀을 읽으며 처음 눈에 들어온 구절이 있습니다.

"속임수를 써서 예수님을 붙잡아 죽일까 궁리하고 있었다." 마르코 14, 1

수석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이 그냥 싫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이 못마땅한 것을 넘어 그냥 싫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모여서 어떤 죄목을 씌워 보려 해도 죄가 되지 않았던 것도 예수님의 행적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싫어하는 이유를 이야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 죄였을 뿐이었던 겁니다. 유다가 어떻게 예수님을 팔아넘길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예수님의 말씀처럼 성경 말씀이 이뤄지려고 그랬나 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만, 살다 보면 죄보다는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 더 많이 생깁니다. 수석사제와 율법학자들처럼 말입니다. 제가 요즘 자주 묵상하는 주제이기도 합니다. 왜 나는 누구를 만나고 싶지 않을까? 왜 그 사람이 싫을까? 이런 생각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 제가 여러 사람을 싫어하고, 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식이 없었습니다. 누구누구랑은 나는 안 맞아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부터 왜 그 생각이 시작되었는지는 잊고 있었습니다. 분명 어떤 사건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 한 사람씩 생각나는 대로 마음속으로 정리를 해보고 있습니다. 여전히 안보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이 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어느 누구는 이제는 만나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도 그 사람의 성품이나 언행이 저와 맞지 않는 경우는 아직은 소극적으로 만나려고 합니다. 소극적으로 만난다는 것은 먼저 연락은 못해도 피하지는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전히 만나서 불편함을 감출 수 없다면, 시간을 더 두어야겠지만 제가 좀 더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기도도 해야겠습니다. 그저 저와 세상을 보는 방법이 달랐다면, 이런 사람도 있구나라고 받아들이는 연습도 해봅니다. 그렇게 마음을 다지고 만나서 또 상처를 받으면 한동안 마음을 닫기도 하지만, 다시 마음을 열 수 있기를 바래봅니다. 최소한 상대에게 부당한 상처는 주지 않기 위해 노력합니다. 제가 상처를 받으며까지 보호해야 할 대상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누구나 생각이 다른 사람을 만나면 편안하지 않습니다. 율법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다른 사람을 피하기만 하면 우리는 작은 동굴에 갇히게 됩니다. 세상에 지쳤을 때 돌아올 동굴은 있어야만 하지만, 새로운 세상으로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을 받아들이는 것도 함께 있어야겠습니다. 예수님이 맘에 맞는 사람들과만 계셨다면 편안하고, 안전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러셨다면, 우리는 어쩌면 지금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전 17화 사순 제5주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