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시니 참 좋았다
사람마다 특별히 애정이 가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 대상은 사람일 수도 있고, 물건일 수도 있습니다. 애정이 가는 이유도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과거의 어떤 추억이 함께 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중요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미래에 꼭 필요하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도움을 받았거나 받기 위해서일 수도 있고, 본인이 무언가 주었거나 주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 대상이나 이유가 다른 사람에게도 소중한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녀가 좋은 예가 아닐까 합니다. 누구보다 사랑스럽고, 과거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소중한 존재입니다. 다른 사람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기준도 다른 사람과의 비교도 필요 없이 특별한 애정이 가는 대상입니다. 부모에게는 가끔 다툼이 생기기도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없는 애정을 쏟는 대상이 자녀입니다. 특히나 엄마에게는 자신의 몸에서 나온 또 다른 자신일 겁니다.
하느님에게도 그러한 특별히 애정이 가는 대상이 있습니다. 직접 창조하신 이 세상이 그렇고, 그 안에 당신의 형상을 따라 만든 우리가 더욱 그렇습니다. 창조를 마치시고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말씀하신 특별한 애정의 대상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래서 모든 좋은 것을 다 주시고, 낙원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받기만 하면 그 소중함을 잊어버리곤 합니다. 아담과 하와도 그랬습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한 번도 우리를 향한 특별한 애정을 거두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외아들 예수님을 보내시고, 우리 죄를 대신하게까지 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생되신 예수님이 오늘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죄를 대신하신 것이 끝이 아니라, 그 죄를 이겨내시고 부활하셨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 희생 제물을 드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부활이 없었다면 예수님의 희생은 지금 우리에게 그저 역사 속의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심으로써 2000년 전의 예수님의 희생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은총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에게 부활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인사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축하를 받는 것이 아니라 신앙을 가진 우리들이 축하를 받습니다. 우리를 위해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다시 창조 이야기로 돌아가보면, 우리는 사랑받기 위해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사랑을 주시기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온 정성을 다하여 빈틈없이 설계하신 이 세상과 함께 우리는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서 우리는 생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보시기에 참 좋은 모습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에게 무한한 애정을 주시며, 성령의 모습으로 항상 함께 하고 계십니다. 가끔씩 우리가 그 사실을 잊곤 하지만 말입니다.
저를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부활절에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모습으로 창조된 제가 오늘도 하느님이 보시기에 참 좋은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리고, 하느님 보시기에 참 좋은 모습으로 살아가겠다고, 그렇게 살아가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해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 “ 창세기 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