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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가는대로 Jun 14. 2024

연중 제11주일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이심전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과 마음으로 통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바로 이심전심입니다. 실생활에서 누군가와 미리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는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서 신기했던 경험이 있으실 겁니다. 더 나아가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잘 알아주는 사람, 아니 알아주었으면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반려자라고 합니다. 짝, 반쪽인 것입니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받는다는 것처럼 편안하고 위로가 되는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빛만 보고, 얼굴만 마주 하고서 마음을 읽는 것은 너무나 어렵습니다. 잠시 눈을 감고, 내가 누구에게 가장 많이 짜증을 내고, 화를 냈는지 돌아봅시다. 길에서 내 어깨를 치고 그냥 간 사람에게는 그저 한번 눈을 흘기면 그만입니다. 회사에서 내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가능한 피하고 생각 자체를 안 하려고 합니다. 그래도 짜증이 올라오면 그 사람을 안주 삼아 술 한잔을 하고 지나갑니다. 그런데, 아내나 남편, 아이나 부모님께는 더 쉽게 짜증을 냅니다. 그 이유가 너무나 간단합니다. 왜 내 맘을 몰라주냐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말하지 않은 내 마음을 몰라준다고 화를 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다릅니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하는 사람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짜증 나게 해서 짜증을 내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이 내 편이 되어주지 않아서, 더 깊게 나를 이해해주지 않아서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이 사람에게서만은 이해받고 싶다는 마음이 화를 내게 만든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합니다.


반대로 말하지 않으면 귀신도 모른다는 말도 있습니다. 상황이나 표정만으로 의사 전달을 할 수는 없습니다. 오해 없이 이해받으려면 정확히 의사 표현이 필요합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 “라고 말하지 말고, ”나는 갈비가 먹고 싶어 “라고 해야 기분 나쁘지 않게 갈비를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정확히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이 내 마음을 잘 알아주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마음을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만, 사랑은 말한 것을 잘 기억하고, 반영해 주는 것에 더 가깝습니다.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는 모호한 표현보다는 정확히 의사 표현을 하면 원하는 것을 얻기가 더 쉽습니다. 설거지를 좀 해달라고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왜 나를 도와주지 않는 거냐고 따지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어쩌면 기도도 이미 하느님이 다 알고 계시겠지만, 내가 원하는 것을 다시 한번 말씀드리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다양한 방법으로 하늘나라를 알려주시는 것도 그렇습니다. 막연히 느끼고 상상하는 곳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마음에 와닿아, 가고 싶은 곳이 하늘나라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하늘나라를 비유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겨자씨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어느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가 자라나면 어느 풀보다도 커져서 새들이 쉴 수 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오늘은 과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비유를 어떻게 풀이해 주셨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늘나라를 겨자씨와 같다고 말씀하시면, 당시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씨앗보다도 작은 겨자씨는 당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보잘것없고, 적은 인원임을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만, 좋은 밭에 심고 가꾸어지면 큰 나무로 자란다는 것은 당시는 힘없고, 작은 공동체이지만, 크게 성장할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이게 된다는 것은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는 뜻일까요?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세상에서 작은 씨앗에 불과하지만, 우리가 큰 나무로 자라서, 지치고 힘든 사람들이 찾아와 쉴 곳이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닐까요. 아니면, 지금은 보잘것없어도, 하늘나라에서는 큰 나무가 되어 다른 이들과 함께 할 것이라는 말도 되지 않을까요.


비유로 말씀하신 데는 다 이유가 있겠지요. 어떨 때는 비유 덕분에 어려운 것도 쉽게 이미지를 그릴 수 있지만, 때로는 비유라서 사람에 따라 다른 느낌을 다가오기도 합니다. 이 모든 것도 다 의도하신 것이겠지요. 그렇지만, 가끔은 제자들에게 하신 것처럼,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시기를 청해봅니다.


”당신의 제자들에게는 따로 모든 것을 풀이해 주셨다. “ 마르코 4,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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