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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이 보이는 집

아픈 시간을 견디게 한 단단했던 공간

by 토모


2004년 12월, 대학2학년 2학기 기말시험이 있던 날이었다. 시험을 치르고 친구들과 시시덕 농담이나 나누던 그 시점에 전화가 왔다.
“엄마, 암이래.”
누나의 울음이 수화기 너머에서 튀었다. 나는 친구의 티코를 얻어타고 한달음에 병원으로 달려갔고 꽤 긴 시간이 흘러 병상에 실려 나오는 엄마의 힘겨운 모습을 지켜보았다.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눈물이 멈추지 않던 그날을 다시 회상했다.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했다.

“마음이 띵하더라. 그래도 초기라 초기라카더라. 치료하면 낫겠지.” 절망 대신 희망의 일상을 믿기로 한 표정이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버지는 절망을 붙잡기보다는 계획을 먼저 세우는 사람이었다. 그 믿음으로 시작해 2018년까지, 14년 하고도 반의 시간이 흘렀다. 한 집의 절반 가까운 세월이 투병이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긴 시간이었지만, 우리에게는 ‘함께’의 다른 이름이었다.


“여기 오면 낫겠다”


어느 날 대구 시내 외곽으로 바람을 쇠러 간 날, 맘에 드는 곳을 보고 엄마가 아버지에게 말했다. “저기, 계곡 보이나? 난 여기 오면 병이 나을 것 같다.”
지인의 안내로 처음 서 본 그 땅은 작은 물길이 집 곁을 굽이쳤다. 바람이 계곡을 타고 곳곳에 퍼져 들었다. ‘뷰 맛집’이라는 말이 딱 맞았다. 아버지는 늘 그렇듯 결심이 빠른 사람이다. “하자 카면 해야지.” 그렇게 아버지와 엄마의 투병을 위한 집이 계곡 위에 솟아났다.


아버지 퇴임에 맞춰 땅을 매입하고 집을 올렸다. 처음 몇번의 건축설계도를 받아들었지만 엄마는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예쁜 집, 멋진 집보다는 편한 집을 원했다. 원래 살던 집처럼 동선이 길지 않고 주방이 편하길 바랐다. 그래서 아버지는 그렇게 했다.


자재는 최고로 좋은 것으로 썼다. 벽돌 한장 한장에 맥반석을 갈아 넣고 가장 좋은 목재들을 구해다 썼다. 일반 주택보다 훨씬 비싼 집이지만 평범한 집, 그것이 아버지가 엄마에게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초반 몇 해는 진짜 ‘사람 사는 집’이었다. 여름이면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가을이면 낙엽을 쓸어 모았다. 겨울에는 장작을 패고 벽난로가 타닥타닥 타올랐다. 친지, 직장동료들이 스무 명 넘게 몰려와 마당을 가득 채우던 날도 있었다. 가마솥에 물이 끓고, 불판에서는 고기가 지글거렸다.


나는 대구에서 트렁크에 먹을거리를 실어 나르고, 엄마는 손님들의 젓가락이 머무는 자리마다 새 반찬을 내놓았다. 밤이면 물소리와 사람 웃음이 겹쳐 들렸다.

평소엔 더 소박했다. 아버지는 밭고랑을 다듬고, 엄마는 접시를 닦고 상추를 뜯었다. “하루 종일 움직일 데가 많다”던 아버지 말처럼, 해가 지도록 몸을 놀리면 마음이 덜 아팠다. 엄마와의 소중한 일상을 회상하며 아버지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여기 안 왔으면… 대구에 그대로 있었으면, 엄마 보내고 나도 벌써 무너졌을 거다.”
계곡의 물과 바람은 그렇게 엄마의 아픔을 씻고 두사람의 평온한 일상을 위해 애써줬다.


마지막 생일 전날


2018년 8월, 오랜 투병생활로 쇠약해진 엄마는 결국 폐렴으로 병원을 찾았다. 병원에 처음 들어올 때까지는 택시를 타고 아버지의 부축을 받아 걸어들어왔다. 며칠뒤면 훌훌 털고 일어날 것 같았지만 희망은 여기까지 였나보다. 3일이 나흘이 되고 일주일이 되었지만 엄마의 호흡기는 떼지질 않았다. "이제 고마 하자"라고 뱉듯이 이야기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잔인할 만큼 침울한 시간이었다. 그날은 엄마의 생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작은 케이크에 불을 붙이고 우리는 희망을 부여 잡았고 아버지는 엄마 귀에 바짝 입을 댔다.
“고마웠다. 먼저 가 있어라. 애들 다 키워 보내고, 약속 지키고, 그때 갈게.”
임종 앞의 약속은 유언처럼 단단했다. 엄마가 평생 놓지 못한 건 결국 자식 걱정이었다. 그 걱정 조금이라도 덜어주고 싶어, 아버지는 그 말을 남겼다.

엄마는 그렇게 가족들에게 마지막 생일 축하를 받고 다음 날 우리 곁을 떠났다.


남은 사람의 시간


엄마를 선산에 모시고 돌아와 첫 제사 밤, 싸늘한 적막으로 제사를 치루고 잠자리에 들어가고 나며 아버지 방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숨쉬는 것도 눈뜨는 것도 고통스러운 시간이었다. 텅 빈 침대, 2쌍의 그릇과 수저, 널려있는 빨래들도 서글픈 순간이었다. 우리는 아버지가 “빨리 따라가고 싶다”는 말을 쉽게 꺼내던 시기를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그렇게 서로를 붙들고 버텼다.
그러다 아버지는 무심코 시골마을 성당을 찾았다. 신부님을 찾아 가지 고통과 눈물을 쏟아냈다. 그렇게 2019년 12월 24일, 세례를 받았다. “하느님 아니었으면 벌써 무너졌다.” 믿음은 슬픔을 없애주지는 못했지만, 슬픔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한 약속을 자주 되뇌었다. “애들 두 놈, 다 장가보내고 간다.” 약속이 사람을 살렸다. 장례가 끝난 자리에서 시작된 또 다른 다짐은, 아버지를 다시 매일의 사람으로 세웠다. 2018년 이후 6년이 지난 지금, 두아들은 결혼했고 이제는 예쁜 손녀들이 함께 아버지를 찾아 계곡이 보이는 집을 찾아오고 있다.


아버지가 쌓아올린 계곡이 보이는 집은 많은 걸 보았다.
여름날 발을 담그던 엄마의 웃음, 손님 맞으러 분주하던 엄마의 손, 밭고랑을 다지던 아버지의 허리, 그리고 해가 기울 때마다 함께 앉아 듣던 물소리.

15년 가까이 엄마를 간병하면서도 아버지는 담담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나한테 주어진 운명 아이가. 탓하기보다 받아들이고 맞춰 사는 기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둔감한 사람이 아니라 강한 사람이었다. 엄마가 떠난 뒤에도, 아버지는 엄마와의 추억으로 가득 찬 집을 지켰고 성당에 가고 아이들의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계곡은 오늘도 흐른다.


한때는 병을 잊게 하려고, 지금은 그리움을 덜어주려고. 우리 집의 시간은 그 물길을 따라 흘렀고, 아픈 순간과 빛나는 순간이 차례로 지나갔다.

돌이켜보면 계곡이 있는 집은 병을 치유해준 기적의 공간이라기보다, 아픈 삶을 견디게 한 일상의 공간이었다. 거기서 우리는 울기도 했고 웃기도 했고 서로를 지지했다.


엄마가 기적처럼 병을 치료해 우리와 지금도 함께 하는 것과 같은 기적은 없었다. 하지만 발목을 적시던 그 계곡물과 뺨을 스치는 바람, 하루를 정리하는 바알간 하늘이 아버지를 여기까지 데려왔다. 계곡의 물소리는 계속될 것이다. 엄마와의 약속이 다 지켜지는 그날까지. 이 집이 우리를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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