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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과 위로

마지막 밤, 그리고 신앙의 시작

by 토모

엄마가 우리 곁을 떠나고 난 뒤, 계곡이 있는 집은 우울했다. 밥상의 한 사람 몫이 비어있는 것이 이렇게 사무칠 수 없었다. 아버지는 그 무게를 버티기 위해 부단히 집안일을 찾았다. 풀을 깎고 장작을 패고 집안 구석구석을 닦았지만 애를 끊는 슬픔은 사라지질 않았다.


“스스로 강한 줄 알았지. 그런데, 엄마 가고 나니 한순간에 무너지더라.”


엄마의 장례가 지나고 한 해가 돌았다. 2019년 여름, 아버지는 동네 신자를 통해 신부님을 만났다. 필요할 때만 말씀을 하시는 말수가 적은 분이었지만 그날만큼은 오래 앉아 있었고, 거의 처음으로 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고 했다. 그 만남이 계기가 되어 예비신자 교리를 시작했고, 성탄을 하루 앞둔 12월 24일, 아버지는 세례를 받았다. 세레명은 '레오'였다.


“도움 정도가 아니고, 나를 살려준 기라.”


아버지는 성당을 처음 갔던 날, 세례를 받은 날, 매일 성경필사를 하는 지금을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믿음은 슬픔을 지우지 못했지만, 슬픔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엄마와의 약속, 아이들을 잘 키우고 행복한 가족을 꾸리는 것을 다 보고 가겠다는 그 약속을 위해 아버지를 다시 ‘매일매일'을 살았다. 미사에 가고, 성경을 소리 내 읽고, 읽는 것이 부족하며 필사를 하며 스스로 단단해지고 있었다. 아버지가 매일 성경을 필사한 원고지 묶음이 쌓여갈수록 다시금 어머니와의 약속, 삶의 생기가 더해져 갔다.


우리 가족은 사실 가톨릭이 아니었다. 하지만 동생을 시작으로 나, 아버지가 차례대로 성당의 문을 두드리고 지금은 부자가 모이면 항상 따라오는 주요한 삶의 지표이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나도 매주 엄마가 하느님의 빛나는 얼굴 곁에서 편히 쉬게 해 달라는 것, 아버지가 오래 건강하시기를 바라는 것, 멀리 미국에 있는 누나 가족의 안전을 위해, 각자의 가정이 성가정으로 화목하기를, 우리 부부와 아이들이 서로를 존중하며 그리스도인답게 살도록. 이름을 하나씩 호명할 때마다, 마음은 묘하게 진정되었다.


그러다보니 엄마가 떠난 뒤, 언젠가 아버지와 산티아고 길을 걸어보고 싶다는 소망도 생겼다. 하지만 아버지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행기는 이제 싫다. 나는 이제 불가능하다.”


아버지의 몸은 지난 세월에 풍화되어 긴 비행과 긴 순례길을 극복해내지 못할 만큼 상해있었다. 속절없이 흘러간 시간이 야속했다. 그 말에도 우리는 가끔씩 이야기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펼친다. 함께 걷지 못해도, 함께 상상하는 길이 남는다. 이렇게 함께 마음껏 상상해보는 것으로도 충분히 의미있을 지 모른다. 어떠한 행위가 꼭 먼 곳까지 가야만 의미있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믿음을 통해 감사와 나눔의 마음도 더 커져갔다. 어느 날 저녁, 아버지는 장기·조직 기증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죽고 나면 필요한 사람들한테 주고 가면 좋잖아.”


그것은 아버지식의 ‘감사’와 ‘나눔’이었다. 믿음이 없었던 시절에도 뭉그레하게 하고 싶었던 장기기증의 의지가 구체화되었다. 이는 살아 있는 동안 받은 위로를 다시 세상으로 돌려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절차를 알아보고, 가족들과 미리 상의해 두는 이유도 남겨질 사람들을 아프지 않게 하려는 배려에서였다. 믿음이란 결국 삶의 마지막까지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을 아버지는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엄마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시작된 신앙은, 시간이 흐를수록 ‘약속과 위로’의 또 다른 이름이 되었다. 엄마와의 사랑은 약속으로 남고, 약속은 다시 신앙이 되었다. 그 신앙이 우리 아버지에게는 가장 큰 위로가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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