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년간의 투병속 지켜가는 약속
2007년은 우리 집에 유난히 어둠이 내려앉은 해였다. 어머니의 폐암이 뇌로 전이되어 그해부터 어머니는 고양시에 위치한 국립암센터를 찾게 되는 일이 많았다. 수술날짜를 잡은 7월, 말년병장이던 나는 상병휴가와 병장휴가를 붙여 긴 시간을 내 엄마와 함께 병실을 지켰다.
그해 겨울, 긴 시간 우리 집을 넓은 등으로 지켜오던 아버지가 쓰러졌다. 한밤중, 누구도 모르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천운이었을까? 아버지는 쓰러지며 화장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히는 바람에 막힌 혈관이 터졌고 아버지는 순간적으로 의식을 되찾아 어머니를 깨웠다. 그 길로 병원으로 찾아가 고비를 넘길 수 있었다. 당시 진단은 협심증이었다. 자칫 잘못했더라면 정말 큰일을 치를 뻔 했었다.
아버지는 관상동맥우회술을 받았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대수술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추가 수술도 이어졌다. 왼팔의 정맥을 떼어 심장에 이식하던 날에도 우리는 수술실 문 앞에서 나지막히 기도했다. 그 해부터였을까 긴 시간 우리집을 받치던 듬직한 어깨가 쳐져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아버지의 몸은 느리게 느리게 쇠약해졌다. 이제는 어머니를 모신 산소에도 오르지 못하게 되었다. 평지를 걷는 것도 숨이 턱까지 차오느는 아버지에게 작은 동산같은 산소는 아버지가 젊은 시절 정복했던 천왕봉보다 높아있었다.
한 번은 병원에서 다급한 연락이 왔다. “오늘밤이 고비입니다. 가족분 내려오세요.” 회사 회식 자리에서 허둥지둥 뛰어나와 밤길을 달려갔다. 그날 밤 동생과 하얗게 밤을 지새웠다. 다행히 아버지는 하루를 넘기며 다시 기적처럼 일어났다. “애들 다 자리 잡을 때까진 버틴다”던, 어머니 앞에서의 그 약속 때문이었을 것이다. 2024년 선거가 끝난 뒤 의원실 회식 날에도, 또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을 찾는 횟수는 조금씩 잦아지고 있다. 가는 세월이 야속했다.
미안함이 자주 고개를 든다. 해드리지 못한 것이 많아 한이 되는데, 아버지의 어깨는 더 가늘어지고 걸음은 느려졌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를 먼저 걱정한다. “며느리는 밥은 잘 먹나? 애들은 감기 안 걸렸나? 괜히 내가 전화하면 부담느낄까봐 니한테 묻는다” 쇠약해진 몸 안에 남은 힘을, 아버지는 여전히 가족에게 쓴다.
돌이켜보면 아버지의 투병은 올해로 18년째다. 어머니를 돌보던 그 긴 시간에도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분이었지만 요즘은 힘든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숨을 고르는 횟수, 의자 가장자리를 꼭 쥐는 손, 한 박자 늦게 올라오는 대답. 그러할 수록 우리에게도 신호가 온다. ‘이럴 때 우리가 더 잘해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될 때마다 아버지와 여행을 간다. 경주를 가고 제주도를 가고 시간 내킬 때마다 추억을 쌓아가려 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태어나서는 좀 더 자주 계곡이 있는 집을 찾아가려 한다. 그렇게 자주 보고 식탁에 둘러앉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치료라고 믿는다.
아버지는 인터뷰를 하며 말한다. “나는 내 몫을 다했다. 이제 너희가 너희 몫을 다하면 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아버지의 몫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아직 어린 손녀들이 “할아버지!” 하고 달려오는 그 순간까지, 아버지는 여전히 우리 가족의 중심이다. 약해진 것은 몸이고, 더 단단해진 것은 약속이다. 어머니 앞에서 한 '두 아들 장가보내고, 손주들 크는 걸 보고, 그때 가겠다는 약속'이 지금도 아버지를 일으킨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했다. “몸은 약해져도, 마음은 아직 넓다.”
그 말 그대로, 아버지의 마음은 넓어졌고 우리의 마음도 자랐다. 이제 우리의 차례다. 계절이 한 번 더 바뀌고, 물소리가 한 번 더 흘러도, 아버지의 자리는 비지 않도록 함께 머물 것이다.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약속을 함께 이어갈 것이다. 오늘도, 내일도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