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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ost in Translation Mar 05. 2016

What do I want?

Mark Manson, Nov 6, 2013

원문 : The Most Important Question of Your Life


모든 사람들은 기분 좋아지기를 원합니다. 근심 걱정 없고 행복하며 어려운 일이 없는 삶을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사랑에 빠지고 완벽한 섹스, 그리고 좋은 유대관계를 겪기를 원합니다. 위대하게 보이길 원하며 돈도 많이 벌고 주변으로부터 존경받는 삶을 원하기도 합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처럼, 당신이 방 안으로 들어가면 거기 사람들이 양쪽으로 나뉘어 당신을 쳐다보는 삶을 원할 겁니다. 


누구나 이런 삶을 좋아합니다. 좋아하는 건 쉬운 일입니다. 

만약 제가 이렇게 물어보죠. "삶에서 무엇을 원하시는지요?" 당신은 아마 "행복해지고 싶고, 좋은 가족을 꾸리고 싶으며 내가 좋아하는 일로 돈을 벌고 싶어요"라고 얘기할 겁니다. 하지만 이런 답변은 너무나 흔해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더욱 흥미로운 질문은, "당신 인생에서 고통을 감수할 수 있습니까?"일 겁니다. 이것은 그간 당신이 제대로 고려하지 않았던 질문입니다. 당신이 기꺼이 그 고통을 감수할 만한 것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고통이라는 것은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결정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모두들 훌륭한 직업을 가지길 원하고 경제적인 자유를 이루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 누구도 일주일 동안 60시간 이상 근무를, 장거리 통근을, 좆같은(obnoxious) 서류 작업을, 회사 내 독단적인 조직 체계를, 그리고 지옥 같이 무한정의 좁은 방에서 심드렁하게 자기 한계에 빠지는 걸 원하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고, 자신을 희생하지도 않으면서, 또 뒤늦게 찾아오는 만족감을 기다리지 못한 채 자산만을 축적하고자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정말로 행복한 섹스를 하고 끝내주는 인간관계를 구축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냉정한 대화, 불편한 침묵, 마음의 상처, 그리고 감정을 분석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려고 않고 원하는 걸 이루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곧바로 타협합니다. 중간점만 찾으려고 한 뒤 몇 년 동안 "만약 이렇게 했었더라면?"라고 계속 자책합니다. 이러한 자기 자책은 시간이 지난 뒤 "정말로 그거였나?"라고 변합니다. 그러다가 변호사가 집을 방문하고 위혼 위자료 관련된 메일을 받게 됩니다. 끝에 다다르면 "정말 뭐 때문에?"라는 질문에 다다릅니다. 20년 전에 세웠던 원칙과 장밋빛 미래가 결국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지금은 정말로 뭐 때문인가요?

행복은 고통을 끊임없이 수반합니다. 긍정은 부정을 관리하는 데서 촉발되는 일종의 부작용입니다. 미리 삶에서 부정적이고 힘든 상황을 겪어봐야 훗날 또다시 찾아오는 비슷한 상황을 피할 수 있을 겁니다. 


인간 행동에 있어 핵심은 우리의 욕구는 대체로 비슷하다는 겁니다. 긍정적인 경험은 다루기 쉽습니다. 부정적인 경험은, 당연히 힘들지만 꼭 투쟁을 하며 견뎌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좋은 느낌에서 비롯되지 않습니다. 성취는 우리가 기꺼이 감수하려는, 그리고 우리를 끝에 가서 좋은 느낌을 가지도록 해주는 나쁜 느낌에서 비롯됩니다.

사람들은 뛰어난 몸매를 가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하루에 몇 시간씩 체육관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고통과 신체적 스트레스를 감당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사업을 가지거나 경제적인 자유를 만끽하길 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리스크, 불확실성, 반복된 실패, 몇 시간씩 집중하는 것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하거나 배우자가 되길 원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거절, 비바람처럼 휘몰아치는 성적 긴장, 결코 울리지 않는 전화벨을 기다리는 상황을 감당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삶의 구체적 방향은 "어떤 것을 즐기며 살겠습니까?"라는 질문이 아닌 "어떤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겠습니까"라는 질문에 답을 하며 결정됩니다. 삶의 질 역시 긍정적인 경험의 질이 아닌 부정적인 경험의 질로 결정됩니다. 좋은 것을 위해 부정적인 경험을 다루는 것이야말로 전체의 인생을 다루는 것과 비슷합니다.

쓰레기 같은 조언을 해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네가 그걸 해내지 못한 건 네가 그걸 충분히 원하지 않아서 그래."라고 말이죠. 모든 사람들은 무언가를 원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충분히 원하고 있지요. 하지만 원하는 것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고, "충분히" 원하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을 겁니다.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원할 때라면 우리는 그것을 추구해내는 과정에서 발생되는 비용도 똑같이 원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식스팩 복근을 원한다면 그만큼의 땀을, 그만큼의 고통을, 그만큼의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을, 그리고 그만큼의 공복을 견뎌야 할 겁니다. 요트 구입을 원한다면 몸에 나쁜 야근을, 또 수만 명을 분노하게 할 위험성을 감수해야 할 겁니다.

수개월, 수년 동안 뭔가를 하기 원했는데 아무런 윤곽조차 보이지 않는다면, 당신은 그저 환상, 이상, 이미지, 그리고 거짓 약속만을 쫓아다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쩌면 당신이 진정으로 원한 것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무엇이 되고 싶다는 것을 즐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종합적으로 당신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던 겁니다.

종종 저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짊어지기 위해 어떤 선택을 내리실 겁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면 그들은 머리를 옆으로 기대며 제가 마치 코가 12개나 달린 사람인 마냥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사람들로 하여금 욕망이나 판타지보다 더욱 근원적인 답을 하게끔 유도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어떤 것이든 선택을 내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고통 없는 편안한 인생을 살 수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 장미나 유니콘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이런 심오한 질문은 중요합니다. 기쁨은 쉬운 질문입니다. 우리는 이 질문에 대체로 비슷한 답변을 내놓기 마련입니다. 더욱 흥미롭고 건강한 질문은 고통입니다. 당신이 계속 감수하고픈 고통은 과연 무엇인가요?

저는 어린 시절 대부분을 뮤지션, 정확히 말해 락스타가 되기를 꿈꾸며 지냈습니다. 일렉기타의 광음을 들으면 저는 자연스레 눈을 감으며 무대 위를 상상했습니다. 많은 수의 관객들이 저만의 기타 줄 튕기는 모습을 보며 환성을 지르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저만의 상상력은 몇 시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대학을 다니면서 계속되었고, 심지어 음악학교를 중퇴한 이후로도 계속되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열렬히 기타 연주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에 앞서 먼저 '언제?'라는 질문이 우선되어야 했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한 노력과 그로 인한 시간 투자를 저는 생각 못했습니다. 첫 번째로, 학교를 마쳐야만 했습니다. 두 번째, 저는 돈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세 번째, 저는 그리고 시간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실천하지 못했습니다.

내 인생 절반 가까이를 이러한 공상에만 허비했습니다. 현실은 뜻대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생각해 본 결과 저는 이것을 진정으로 원하지 않았던 겁니다. 

저는 결과만을 좋아했습니다. 무대 위에 있는 내 모습, 나를 보며 환호성을 내지르는 관객, 끝내주는 나의 연주만을 상상한 나머지 그런 순간들이 되기까지 몇몇 단계들을 끝내 지나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는 실패했습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요. 그것도, 실패를 하기 위해 노력하지도 않았습니다. 거의 시도도 안 했지요.

매일 단조롭고 지겨운 악기 연습, 동료들을 찾거나 연습 일정을 잡는 일, 공연 장소나 관객 개발 등과 관련된 일련의 일은 고통스러웠지만 저는 결코 하지 않았습니다. 끊어진 기타 줄, 맛이 간 앰프, 40파운드나 나가는 장비를 차도 없이 매일 손수 끌어 다니며 다녀야 했습니다. 저에게는 꿈이라는 산이 있었고, 산더미에서 등정해 정상에 오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현실을 체감하고 나서야 발견한 것은, 저는 등산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저 상상의 나래 속에서만 산을 올랐을 뿐이에요.

It's a mountain of a dream and a mile-high climb to the top. And what it took me a long time to discover is that I didn't like to climb much. I just liked to imagine the top.


이 시대의 문화는 나는 어떤 이유든지 간에 실패를 맛보는 부류와 얘기합니다. 즉, 제가 루저이거나 포기자라는 것이죠. 자립을 중요시하는 영역에서 저를 용기가 없거나 결단력 부족인, 아니면 제 자신을 제대로 믿지 못한 사람이라 치부합니다. 스타트업이나 기업가정신을 중요시하는 영역에서는 저를 사회의 관습적인 규율에 의해 저만의 꿈을 내주거나 포기한 사람으로 봅니다. 결단을 하루빨리 내리라고, 소수의 협력자들에게 찾아가라고, 네 의지를 확실히 밝히라고, 뭐라도 하라는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진실은 그보다도 평범했습니다. 무엇을 원한다고 느낀 저지만 실상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게 결론입니다. 


저는 떡꼬물만 원했지 고통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과정이 아닌 결과만을 꿈꿨습니다. 승리만 원했지 투쟁을 감내하지 않았습니다. 삶은 저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려는 가치로 인해 결정되어집니다. 체육관에서 고통을 짊어지려는 사람들은 훗날 좋은 몸매를 가질 겁니다. 업무와 사내 정치를 즐기는 사람들은 훗날 더 높은 단계로 진전합니다. 배가 고픈 예술가의 삶을 추구하는 것에 따른 불확실성과 스트레스를 즐기는 사람들은 훗날 자신이 좋아하는 걸 하거나 그에 따라 살 겁니다.

이건 의지나 투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건 '고통 없이는 얻는 게 없다(no pain no gain)'의 또 다른 버전이 아닙니다. 


그저 이건 가장 간단하면서도 기본적인 삶의 요소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선택한 고통이 우리의 성공 척도가 됩니다. 그러니 제발 현명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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