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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Feb 27. 2017

대만 대학교의 한국어교육 2

[대만의 한국어 교실]수강생 초과 사태, 그 대비책은

나는 삼수생이다.

박사과정에 입학하기 위해 세 학교에 한 번씩, 총 세 번 입시 시험을 치렀다.

결국, 마지막에 시험을 본 대학의 신생 학과에서 나를 받아주었다.

육 년만의 결실이었다.


단 한 번도,

한 번에,

떡, 하니

입학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학사와 석사과정은 모두 대기자 명단에 있었다가 입학식 즈음해서 합격을 통보 받았으니, 오히려 쉽게(?) 들어간 편이었다. 적어도 ‘재수’ 없이 시험을 친 그 해에 입학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나는 그렇게 ‘걸어다니는 커트라인’(학력고사 세대에 해당되는 분들은 아시겠죠?^^)이 되었다.


수치화된 점수로 나를 판단해 주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이었다는 사실을 느낀 적이 있었다. 국내 모 대학의 박사과정에 들어가기 위해 면접 고사를 볼 때였다. 대여섯 명의 교수들이 자리했는데, 그 중 한 노 교수는 아예 의자를 벽 쪽으로 돌려 놓고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면접은 진행되었고, 한 교수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문화가 뭐라고

생각하나 OR 생각하는가 OR 생각하는데…"


그 교수가 사용한 어말어미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으나

분명히 “생각하십니까?” 혹은 "생각하세요?"는 아니었다.


나는 준비한 내용을 떠올려 약 20초간 대답을 했다.

그에 대한 반응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학교에서 잘못 배우고 왔군.”


의자를 삐뚜름하게 돌려 놓고 앉아 있던 노 교수의 첫 마디였다. 그는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였다.

예상대로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학사, 석사 육 년간,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않은 ‘모지란 학생’으로 평가를 받은 순간이었다.

그것이 진정 사실이라 할지라도 당시에는 누군가를 탓해야만 했다.

그래서 참아왔던 속엣말을 뱉어냈다.


"씨발, 기분이 되게 더럽네."




엄격, 엄선, 열정, 그리고 경쟁심


원하는 것을 얻을 때라면 이러한 붉은 색 계열의 마음 가짐이 필요하다 믿었다.

엄격한 기준으로 열정을 가진 학생들을 엄선해야 하고, 그 학생들끼리 경쟁을 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교육 받아온 방식이었고, 그러한 과정만이 올바른 결과를 이끌어 낸다고 보았다. 오래 전 박사과정 입학 시험에 불합격한 이유 또한, 내가 그러한 기준에 부합되지 않아 노 교수의 눈에 ‘물러터진 모지란 것’으로 보였다는 생각도 끊이지 않았다.


 “이 수업을 왜 들으려고 하죠?”


마지막으로 내 앞에 선 학생은,

이 질문에 작은 목소리로, “발음이랑 기초를 배우려고”라는 말만 반복적으로 했을 뿐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질문에 모두 대답을 한 것은 아니었고, 한국어를 그렇게까지 들어야겠다는 열정이 보이는 것 같지 않았다. 조교들에게 확인하니 그 학생은 내 질문 두 가지에 모두 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고 했다.

결국, 그 학생은 추가 수강생으로 받지 않기로 했다.


그 학생은 자리로 돌아가 주섬주섬 책을 챙기고는 자리를 떴다. 맨 뒤에 앉았던 한 여학생이 재빨리 앞으로 뛰어와 그 학생의 자리를 꿰차고 앉았다. 가방을 메고 교실 밖을 향하는 학생의 뒷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마음 한 구석 어딘가가 찜찜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이틀 후, 그 학생으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선생님께,
저는 이 수업을 신청하고자 하기 전에 왜 수업을 듣고 싶은지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한국어의 기초를 다지고 싶었고, 한국 선생님을 통해 한국 문화에 대해 이해하고도 싶었습니다. 하지만 인터뷰를 하는 동안에는 제 생각을 정확히 말하지 못했습니다. 선생님이 기회를 주셨는데, 그 기회를 활용하지 못 한 건,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이 수업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올바른 영어식 표현으로 예의 바르게 쓴 이 글을 본 뒤,

나는 곧바로 학생에게 답장을 썼다.

이제야 학생의 진심을 이해하게 됐다고 했고, 그 진심을 진작 이해하지 못해 미안하다고 정중히 사과했다. 그리고 그 학생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는 기회가 오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물론, 학생이 한국어를 배우고 싶은 마음을 계속 간직한다면…




적어도 내가 가르치는 순간에는 배움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했다. 언어란, 타인과 소통을 하기 위해 배우는 거라고, 인간 대 인간을 만나기 위한 과정에서 고통스러워지거나 불편한 감정이 들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것이 나의 철학이라고 스스로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결국,

배움의 열의를 한 움큼 들고 온 신입생에게 생채기를 주고 돌려 보낸 것 같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그 불편함의 근원을 조금씩 되짚어 보기로 했다.

그 과정은 더 불편했지만, 피할 수가 없었다.



모든 아이들에게는 저마다의 성장 방식과 속도가 있듯이,
배우고자 하는 열의를 표현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었다.
무언가를 열렬하게 좋아하는 아이도 있고,
좋아하는 대상에 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다가가는 방식을 선택하는 아이도 있었다.
성격 차이가 있듯이 열정에도 각자의 색이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종종 잊는다.

유독 붉은 색 계열을 띠는 열정의, ** “불타오르는” 방식을 택한 아이들에게 먼저 손을 내민다. 그러다가 천천히, 소리 없이 자신의 열정을 보이며 다가오는 아이들을 미처 보지 못할 때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불편한 마음으로 찾은, 내 안의 불편함이 아닐까?


뭐가 맞는지 아직도 많이 헷갈린다.


이십 년이나 가르쳤는데도,

“알아서 하시기”에는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너무도 많은 조 선생.



그 학생에게 건넨 사과가 부디 너무 늦지 않았으면 한다.







*이기호 장편소설, <사과는 잘해요> 인용

**방탄소년단, <불타오르네 Fire>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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