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땐, 이런 책]라틴어 수업
초등학교(국민학교) 고학년때였다. 교과서에 공사현장에서 노동을 하는 인부들의 사진이 실렸다. 담임선생님께서는 그 사진을 가리켜 이렇게 말씀하셨다.
니들도 공부 안 하면, 나중에 이렇게 된다.
이 사람들도 얼마나 공부를 못했으면, 쯧쯧
그 단원의 주제는 분명, “공부 못하면 나중에 공사판에서 삽질합니다.”는 아니었다. 담임 선생님은 학습 주제와 전혀 상관이 없는, 허나 우리의 인생과 직결된다고 믿는 주제로 열변을 토하셨다. 그것은 바로, “삽질하지 않는 삶”이란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간 뒤에 돈을 많이 벌고 떵떵거리며 사는 삶이었다.
집안 모임에서의 일이었다.
버스로 고속터미널에 가려고 하는데, 몇 번을 타야 하느냐는 한 어른의 질문에 나는 몇 개의 버스노선을 알려 드렸다. 그런데 그 어른은 내게 물었다.
“좌석버스는 없어?”
1980년대에는 비교적 편안한 좌석이 촘촘히 배치된 좌석버스와 지금과 같은 일반 버스가 있었다. 좌석버스의 요금이 훨씬 비쌌기에 같은 거리를 가는 버스라면 당연히 요금이 저렴한 일반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것이 상식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오히려 더 비싼 버스를 타겠다는 어른의 의중을 이해하기 어려워 물었다. 왜 일반 버스를 타지 않느냐고 말이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노동자냐?
일반 버스 승객과 노동자와의 상관관계를 따지기 어려웠으나, 그는 아마도 조금이라도 ‘고급진’ 교통수단을 타야 ‘일반인’과는 달라 보인다고 느꼈을 것이다.
나의 성장과정에서는 학교와 가정에서 ‘노동’과 ‘노동하는 자’를 폄하하는 태도를 적지 않게 접해 왔다. 나는 그때마다 의아하게 생각했다. 노동은 일을 하는 것이고, 노동자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도대체 왜 노동과 노동자는 우리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로 전달되어야 했을까. 그러니까 왜, 노동은 우리가 “하면 안 되는 행위”가 되었고, 노동자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되어 버렸던 것일까. 안타깝게도 나의 성장 과정에서는 이러한 궁금증조차 불손한 대상이 되어야 했다.
나는 그렇게 컸다.
선생님과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공부를 많이 해 ‘떵떵거리며’ 사는 윗사람들 중에는 노동을 폄하하는 족속들이 적지 않으며, 자신이 하는 일은 노동이 아닌 명령이라 믿는 이들이 많다. 노룩패스와 경비원 해고를 비롯한 어이 없는 갑질은 최근에서야 언론에 공개되었을 뿐, 우리의 성장 과정에서는 적지 않게 접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너무 당연한 나머지 “원래 그들은 그렇게 살아야 하고, 나는 이렇게 해야 하는 거라며” 주문을 걸었을 것이며, 또 너무 자연스러운 나머지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 일이 되었을지도.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은 내게 노동에 대해 한참 생각해 보게 했다. 자신을 공부하는 노동자라 명명하는 지식인들이 많은 사회라면, 오늘날 어처구니 없이 일어나는 노동 문제가 조금은 줄어들지 않았을까, 또한 아이들이 자라면서 노동에 대해 올바르게 알아갈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공부해서 남 주냐?
공부해서 잘해서 나중에 큰소리 치고 살아야지
공부 잘하면 나중에 편하게 산다
어른들로부터 수시로 들었던 말들이 머릿속을 스친다.
그래서 정말 공부를 잘 해버린 아이들은
제가 공부해 놓은 걸 죄다 자기만 갖을 뿐만 아니라 남의 것도 자기 걸로 만들어 버렸다는,
그러고서도 잘 했다고 떵떵거리며 사는 유치한 인물이 돼 버렸다는,
때로는 혼자만 유치해진 게 아니라 전지구적으로 민폐를 끼치는 끔찍한 괴물이 되기도 했다는,
때로는 타인을 해친 죄인이 되기도 했다는,
그러한 이야기를 우리는 오늘자 신문에서도 찾아낼 수 있다.
동시에, 자신을 공부하는 노동자라 명명한 한동일 스승님과 같은 분이 계셔서 학생들은 제대로 된 교과서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고, 나 같은 외국인 노동자는 나의 노동에 조금씩 의미를 부여하며 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다고 믿는다.
내가 잘못 받은 교육에는 아직까지도 A/S가 많이 필요하다.
책을 읽는 이유를 굳이 꼽으라면 이 이유를 대야 할 것 같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12173214
(82)
에고 숨 오페라리우스 스투덴스 Ego sum operarius studens 나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83)
그런데 겸손한 사람이 공부를 잘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겸손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실패의 경험에 대해 지나치게 좌절하고 비관하기 쉽습니다. 이것은 ‘실패한 나’가‘나’의 전부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건 자기 자신을 잘못 알고 있는 겁니다. 일종의 자만이라고도할 수 있어요. 한 번의 실패는 나의 수많은 부분들 중 하나일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쉽게 좌절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잘못 이해한 겁니다. 우리는 실패했을 때 또 다른 ‘나’의 여집합들의 가능성을 볼 수 있어야 해요.
(84)
그러나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그 순간이 나의 ‘최선’일 수도 있습니다.
(87)
인간이라는존재는 어떻게 보면 처음부터 갈등과 긴장과 불안의 연속 가운데서 일상을 추구하게 되어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 과정 속에서 끊임없이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삶이기도 하고요. 결국 고통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음의 표시입니다. 산 사람, 살아있는 사람만이 고통을 느끼는데 이 고통이 없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모순이 있는 소망이겠지요. 존재하기에 피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우리는 공부하고 일하며 살아갑니다.
(90-91)
저는 공부하는 노동자입니다. 공부라는 노동을 통해 지식을 머릿속에 우겨 넣는 것이 아니라 그 과정을 통해 나를 바라보는 노동자입니다. 그리고 그 사실이 싫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여러분은 과연 어떤 노동자입니까?
(181)
공부는 무엇을 외우고 머릿속에 지식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걸음걸이와 몸짓을 배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177)
사실 우리의 아픔은 위로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에 대한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한 문제일 겁니다. 그런데기득권을 누리는 사회 일각에서는 자꾸 개인의 문제로 돌려 청년들의 삶을 더 피폐하게 만들어요. 개신교의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 1892-1971)가 말한 ‘윤리적 인간, 비윤리적 사회’라는말이 시시때때로 간절히 생각납니다. 우리 사회는 어떤 한 개인이 윤리적으로 잘 살고 싶어도 살기 힘든그런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불법을 부추기고 합법엔 인내를 발휘해야 합니다. 정직하고 바르게 살면 무능한 것이고 약삭빠르고 초법적으로 살면 능력 있다는 소리를 듣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지금 고통이 턱밑까지 차오는 이들에게 해봐야 전혀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중략) 이들의 울분과 아픔을 근본적으로 해소해주기 위해서 어른들은 위로한 일이 아니라 팔을 걷어붙여야 합니다. 그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도와주고 지원사격을 해줘야 해요.
* 본 글은 <알라딘의 서재>에도 공유합니다.
http://blog.aladin.co.kr/koreacym/103289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