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영미 Jun 10. 2018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며,

[이럴 땐 이런 책]외국에서 혼자라고 느낄 때, <쇼코의 미소>


<쇼코의 미소>를 몇 달 전에야 접했다.

일곱 편의 중단편 중에서 네 편이 짧고 긴 외국 생활을 주무대로 했다.

주인공과 그밖의 등장인물들도 외국인이었다.

외국에서 외국인과 생활하는 입장에서

외국인과 외국어로 소통하는 상황,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어색함, 오해, 혹은 이해를 한국어로 풀어낸 작가의 재주에 놀라워했다. 하지만 이 작가의 글을 읽으면 읽을수록 알게 되었다. 내가 이 작가의 글에 끌리는 이유는 <외국 생활> 혹은 <외국인>이라는 키워드뿐만 아니라, 낯선 곳에서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거울에 보이는 내가 전부가 아니라고,

네가 아는 나도 전부는 아니라고,

그동안 살아온 나는 극히 작은 일부가 될 수도 있다고,

낯선 곳에서 만난 나는,

오늘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쇼코의 미소 

(처음) 

 나는 차가운 모래 속에 두 손을 넣고 검게 빛나는 바다를 바라본다. 

 우주의 가장자리 같다. 

 쇼코는 해변에 서 있으면 이 세상의 변두리에 선 느낌이 든다고 말했었다. 중심에서 밀려나고 사람들에게서도 밀려나서, 역시나 대양에서 밀려난 바다의 가장자리를 만나는 기분이라고. 외톨이들끼리 만나서 발가락이나 적시는 그 기분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고 했다.


(24)

 “쇼코, 쇼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그러더니 소유가 왔다고, 한국에서 소유가 왔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방안에서는 작은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노인은 문고리를 돌려 보더니, 안에서 문이 잠겼다고 몸짓으로 말했다. 덥고 습한 날씨였지만 서늘했다. 쇼코는 더 이상 나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나는 그냥 쇼코의 가상 친구나 일기장 정도였는데, 쇼코는 그냥 그 일기장에 일기 쓰기를 그만둔 것뿐인데, 일기장 주제에 쇼코의 삶에 개입하려고 했다니.

(중략)

“네가 그리웠어.” 

 나는 쇼코가 조금 미워져서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리웠었다는 그 말에 눈물이 났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 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사실 쇼코는 아무 사람도 아니었다. 당장 쇼코를 잃어버린다고 해도 내 일상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쇼코는 내 고용인도 아니었고, 나와 일상을 공유하는 대학 동기도 아니었고, 가까운 동네 친구도 아니었다. 일상이라는 기계를 돌리는 단순한 톱니바퀴들 속에 쇼코는 끼지 못했다. 진심으로, 

 쇼코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쇼코에게 내가 어떤 의미이기를 바랐다. 쇼코가 내게 편지를 하지 않을 무렵부터 느꼈던 이상한 공허감. 쇼코에게 잊히지 않기를 바라는 정신적인 허영심.



씬짜오, 씬짜오


(70) 

 응웬 아줌마는 엄마에게 직접 만든 크림을 줬다. 샤워한 후에 꾸준히 바르면 가려움이 줄어들 거라고. 엄마는 아줌마의 크림 덕분에 남은 여름을 수월하게 보낼 수 있었다. 아줌마는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어디가 불편한지 알고 있었고, 배관공을 부르거나 집주인과 이야기 해야 할 때도 나서서 일을 해결해줬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두 살짜리 아이를 붙들고 하루종일 집에 고립되어 있던 엄마의 유일한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엄마를 보면 홀로 투이를 키워야 했던 시간이 떠오른다고. 혼자 그렇게 오래 있으면 자연히 어두운 생각에 빠지게 된다고, 이야기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했다.


(89-90) 

 시간이 지나고 하나의 관계가 끝날 때마다 나는 누가 떠나는 쪽이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생각했다. 어떤 경우 나는 떠났고, 어떤 경우 남겨졌지만 정말 소중한 관계가 부서졌을 때는 누가 떠나고 누가 남겨지는 쪽인지 알 수 없었다. 양쪽 모두 떠난 경우가 있었고, 양쪽 모두 남겨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떠남과 남겨짐의 경계가 불분명한 경우도 많았다.




한지와 영주 


(136) 

 “아니. 처음에는 그냥 일주일만 머물려고 했었어. 일주일이 이 주일이 되고, 이 주일이 삼 주일이 되고, 나도 내가 얼마나 여기에 있을지 몰라. 학교도 휴학했고, 아무 계획이 없어. 난 스물일곱 살이야.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아.” 

 “왜?” 한지가 물었다. 

 “도피하는 건 옳은 게 아니니까. 내 삶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하니까.” 

 “괜찮아, 영주.” 한지가 말했다.  

 충동적으로 여기에 머물기로 한 것도, 네가 해야 했던 일을 내팽개쳐버린 것도, 수도원 생활도 모두. 괜찮아. 

 그 이야기를 하는 한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나를 위로하려는 얼굴도 아니었고,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빈말을 할 때의 얼굴도 아니었다. 웃을 때조차도 상대방을 의식하는 어른들의 얼굴도 아니었다. 한지의 얼굴은 그저 자연스럽게 풀려 있었다. 

 대학원이라는 좁은 사회로 진입하면서 나는 사람을 조심하라는 충고를 많이 들었다. 대학원 사람들을 경계하지 않는 내 태도가 굉장히 유아적이라는 것이었다. 특히 여자는 이미지 관리가 중요하다고, 한 번 뒷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면 미래가 없다는 이야기를 나는 밥먹듯이 들었다. 

 그리고 나는 꽤나 그 룰을 잘 따라왔다고 믿었다. 수업과 답사에 적극적이었고 뒤풀이에도 참석해서 늦게까지 웃고 떠들었지만 집으로 가는 길엔 아무 이유 없이 울었다. 


(164)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나는 그 말을 언제나 기억한다. 


(168)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내 고통에 대해 시위하고 싶지 않았다.




먼 곳에서 온 노래 

(193) 

율라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어렸다. 

 “그와 헤어지고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미진이 집을 보러 왔어요. 같이 살기로 하고, 밤마다 이 식탁에 앉아 이야기했지요. 미진이 러시아에 온 지 일 년밖에 안 돼 어려운 점이 많을 때였습니다. 내게 도움을 청할 때마다 기꺼이 들어줬어요. 같이 이민국에도 가고 학교에도 가고, 미진이 러시아 말로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을 대변인처럼 말해주고. 미진은 내게 고마워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때 나는 나보다 약한 누군가를 도와주는 내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아요. 말로는 친구라고 하면서도 내가 미진보다 더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못해, 라고. 미진이 점점 더 러시아 말을 잘하게 될수록, 저의 도움이 필요 없어질수록, 매력적인 친구들과 어울릴수록 미진에게 화가 났습니다. 미진이 내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어요. 넌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무것도 아니야. 그게 날 견딜 수 없게 하더군요. 이타심인 줄 알았던 마음이 결국은 이기심이었다는 걸 깨닫게 된 건 미진이 떠난 이후였습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86799537



이글의 제목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며,>는 아래 책 <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에서 따왔다.

문화인류학에 대한 관심을 키워준, 내겐 참 고마운 책이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29756


* 알라딘 서재, 서평 블로그에도 본 글을 공유했습니다.

http://blog.aladin.co.kr/koreacym/1032832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