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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미 Mar 28. 2018

대통령의 쌀국수, 코끼리 쌀국수

[살아 보니, 대만]대만의 베트남 여성

학교 앞 베트남 요리는 일품이었다. 한 그릇에 80원(한화 약 2,953원)인 쌀국수는 진한 국물 맛이 최고였다. 


나는 두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베트남 음식 먹은 적이 있다. 


몇 해 전 7월, 대만에 와서 학기가 시작되는 9월 중순까지였다. 학교 후문 건너편에 위치한 허름한 베트남 식당을 알게 된 후, 점심과 저녁을 모두 아이와 함께 그곳에 가서 먹곤 했다. 한국어를 할 줄 아는 한 대만 학생이 그 식당을 소개해 주고는, 주문 용지에 쓰인 이십 개 가량의 음식 중 딱 두 개를 골라, 그 옆에 “어무라이수(오므라이스)”, “탕쌀구수(쌀국수)”라고 써 주었기에 그것만 시켜 먹었다. 다른 식당에서 감히 주문할 용기가 없었던 때였다. 


환인광린(歡迎光臨, 어서 오세요) 

여닫이 문을 열고 들어갈 때면 그녀는 언제나 우리를 반갑게 맞았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에어컨을 켰고, 주문용지나 식기류 등을 갖다 주며 말을 걸었는데 우리는 대답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매번 질문을 웃음으로 넘겼다. 37도를 웃도는 낯선 땅의 여름날, 딱히 갈 데도 없었던 우리를 그렇게 환한 얼굴로 맞이해 주는 이가 있어서 마음이 참 편했다. 어쩌면 그녀가 우리를 반겼기 때문에 그 식당을 더 자주 찾았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음식을 내오면서도 그녀는 항상 내게 무언가를 물었고, 그건 음식과 관계가 없는 말이라 추측했으나, 도무지 대답할 수가 없었다. 하루에 한 개씩만 외워지는 “오늘의 생존 중국어”를 겨우 써 먹을 시기였으니, 우리의 의사소통은 눈웃음으로 서로의 마음을 전하고, 음식을 주문하고, 돈을 내는 선에서 멈춰 있었다.  


어느 날이었다. 

그녀가 내게 거는 말을 이해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대만 친구를 데리고 그 식당에 갔다. 그녀는 내 친구도 반갑게 맞아주고는 빠른 속도로 말을 했다. 나를 보면서 하는 이야기였으니 나에 대한 이야기였을 것이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나는 대만 친구에게 물었다. 그녀가 뭐라고 했느냐고. 


 “저 사람이 하는 말, 거의 못 알아듣겠어.”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녀는 대만에 온 베트남 출신 결혼이주여성이라는 사실을. 나는 대만인과 베트남인이 쓰는 중국어의 억양이나 발음 차이도 구분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나란 사람은 하나를 모르면, 둘도 몰랐다. 그 식당의 이름이 따샹(大象)인데, 그게 중국어로 코끼리라는 것을 알게 된 날도 그 때였을 것이다. 하나를 알고 둘을 알게 된 날도 없지는 않았다.  


코끼리 식당 

학교 앞에 위치한 만나 분식, 같은 친근한 이름이었다. 개강을 한 뒤로는, 12시 점심시간, 5시 하교 시간이 되면 학생들은 삼삼오오 코끼리 식당으로 모였다. 나도 때로는 아이와 함께, 혹은 학생들이나 동료와 함께 코끼리 식당으로 갔다. 종종 우리 반 학생들을 우연히 만나기도 했다. 그들은 밥을 먹으며 한 사내아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사장님의 아들이었다. 아이는 대여섯 살 정도 되어 보였고, 또래 사내아이들이 종종 그러하듯이 그 아들내미 또한 무척 시끄럽고 장난기가 많았다. 식당 손님들은 아이가 소리를 질러도 불평을 하기는커녕 돌아가면서 아이와 놀아주곤 했다.  


몇 개월이 지나 나의 중국어로 슬슬 쓸 만해지고, 그녀와도 좀 더 가까워지자, 그녀는 내게 몇 살이냐고 물었고, 나는 몇 살이라고 답했고, 그녀는 아직 젊네, 혹은 생각보다 젊네, 로 추정되는 말을 했고, 나는 그녀에게 몇 살이냐고 묻는 대신, 나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다고 했고, 우리 애가 느그 애보다 더 크지 않느냐고 하기도 했다. 그러자 그녀는 내게 아이의 유치원을 바꿔야 하나, 요즘 고민 중이라는 얘기도 했다. 아이를 더 잘 가르치고 싶어하는 엄마의 마음은 누구에게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김치통을 꺼내 와서는 내게 보여주며 이렇게 물었다.  


“김치를 어디서 사면 좋을까?” 

그녀는 김치를 근처에서 사오는데 값만 비싸고 맛이 없다고, 돈이 들더라도 맛있는 김치를 사고 싶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남편이 한국에서 올 때마다 김치를 들고 와서 별로 사 먹는 일이 없다고 답했다. 그녀는 내게, 대만에서 먹는 김치랑 한국 김치랑 맛이 다르냐고, 어떻게 다르냐고 연신 물었다. 대만 김치는 식초가 많이 들어가고 단 맛이 나고, 별로 맵지 않은 생김치가 주로 인기인 것 같다고, 우리는 김치 종류가 다양하다는 내용을 연결이 되지 않는 짧은 말들로 설명했고, 그녀는 내 말에 “그래?”라고 맞장구도 쳐 주었다.  


시간이 흐르자 다른 대만인보다 그녀와의 중국어 대화가 조금 더 편해졌다. 외국인들끼리 외국어로 대화할 때 감지하는 심리적 안정과 원어민화자는 절대 공감할 수 없는 효율적인 소통 방식이 우리의 대화에는 녹아 있었다. 


한국어 초급반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독일 학생과 일본 학생이 세계지도를 보며 한국어로 대화하는 장면을 보았다. 제3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러나 아주 간단하고 깊이 있는 대화를 그들끼리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중간 중간에 말이 끊겨도 답답해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편안해 보였다.  


코끼리 식당 사장님과 나도 그랬다.  

대만인들이 거의 못 알아듣겠다는 그녀의 중국어를 나는 이해하기가 쉬웠으며, 대만인들이 몇 번이고 되묻는 나의 말 또한 그녀는 단 번에 알아들었다.  


우리의 우정도 그렇게 쌓여갔다. 

어느 새, 우리는 살아가는 이야기를 짧게나마 전할 수 있는 친구 같은 사이가 되었으며, 외국인 노동자의 삶을 꾸리는 이들로서 일종의 연대의식도 공유했다. 우리는 모두 외국에서 외국어로 말하며 돈을 버는 노동자이자, 외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부모이기도 했다. 때로는 답답한 심정을 토로할 길 없어 누구라도 붙잡고 되도 않는 말을 쏟아내고 싶어하는 이방인이기도 했다. 어쩌면 그녀는 대만에 갓 도착해서 그녀 식당의 문을 열었던 나를 보고, 자기의 모습을 보았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낯선 땅에서 겁먹은, 그러나 그 모습을 애써 감추며 아무렇지도 않은 척 “어무라이수”와 “탕쌀구수”가 적힌 주문 용지를 들고 끼니를 해결하는 이방인의 표정에서 오래 전 이국 땅으로 시집와 살림을 꾸리던 자신이 떠올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코끼리 식당 이번 주가 마지막이래요.” 

대만 생활이 일 년 반쯤 지났을 때였다. 나는 학생으로부터 이 소식을 듣고 그날 저녁, 코끼리 식당으로 갔다.  

“정말이야? 이제 식당 안 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식당 일을 접는다고 했다. 건물주와의 문제라고 했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었다. 그날부터 나는 매일 아이와 그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리고 마지막 날이 되었다. 그날은 코끼리 식당은 발 디딜 틈 없이 학생과 교직원으로 식당은 가득했다. 그녀와 사진을 찍는 학생들도 있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식당 앞에서 그녀와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의 배경에는 중국어로 歡迎光臨(환인광린, 어서 오세요)이 크게 보였다. 그녀 식당 문에 쓰인 붉은 색 글자였다. 




문재인 대통령의 쌀국수가 연일 화제였다. 

http://v.media.daum.net/v/20180324125322906 

문재인 대통령 내외는 하노이 시내에 위치한 3대 쌀국수 식당을 찾아 베트남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그들과 함께 그들의 아침 식사를 했다. 반가운 모습이었다. 방문한 나라를 알아가고 존중하는 마음은 현지인들과 그들이 즐겨 먹는 음식을 함께 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대통령의 쌀국수를 보며 코끼리 식당의 쌀국수를 떠올렸다. 

베트남 쌀국수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베트남의 대표 음식이자, 베트남 새댁들이 타국에서 생계를 위해 혹은 고향을 그리며 끓이는 국수가 되기도 한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외국 출신 모(母)의 국적은 베트남이 32.2%로 가장 높고, 그 뒤로 중국(24.4%), 필리핀(7.6%) 순이라고 한다. 2016년 출생아 모(母)의 국적별 비중을 보면 베트남 어머니가 제일 많다.  

  

2016년 출생아 모(母) 국적별 비중 (통계청)


대만도 신주민(新住民)이라고 불리는 결혼이주여성의 수가 증가했다. 다문화가정 자녀인 신주민자녀(新住民子女) 교육 정책에 대한 연구도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대만에서는 베트남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베트남 출신 어머니들이 많기 때문이다.  2016년 대만인으로 귀화한 이들 중 동남아 국적의 배우자 중 베트남 여성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통계는 다음과 같다. 


2016년 대만 귀화자 국적별 명수. 베트남,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말레이시아 , 미얀마, 캄보디아, 싱가포르 순이다. 출처는 아래와 같다.

http://www.epochtimes.com/b5/17/4/22/n9063676.htm



1991년 베트남이 자본 시장을 외국인에게 개방하자마자 아시아, 특히 대만의 중소 자본들이 대규모로 베트남에 몰려왔다(Wang & Chang, 2002). 대만 자본의 진출은 동시에 베트남 여성을 현지처로 맞이하려는 대만인들의 수를 증가시켰고, 그 결과 많은 베트남 여성들이 조직적으로 대만으로 결혼 이주를 감행했다. 2000년에는 그 수가 14만 명에 이르게 될 만큼 대규모라고 한다. 
-      <국경을 넘는 아시아 여성들: 다문화 사회를 만들다> 中,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대통령의 쌀국수에서 코끼리 쌀국수의 맛이 전해졌다.

나는 베트남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 현지의 쌀국수가 어떤 맛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국과 대만에서 가정을 꾸리고 성실히 자기 몫의 일을 하는 베트남인들이 끓인 쌀국수의 맛은 알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코끼리 식당의 쌀국수가 내게는 최고다.  


넉넉하고 따뜻한 마음씨로 이국 땅에서 자기의 길을 내어간 코끼리 식당 사장님이, 문득 생각난다. 나의 첫 이웃사촌이었던 그녀가 그립다. 한국에서 만난 베트남 학생들, 대만의 한 교실에 앉아 있는 대만-베트남 다문화가정 출신 학생들의 모습도 생각났다. 그들도 모두 제 어머니가 끓여준 쌀국수를 먹고 자랐을 것이다. 베트남 여성들이 타지에서 끓이는 쌀국수는 그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속 끓이는 답답한 심정이 담기질 않았으면 한다. 그녀처럼 당당히 생계를 꾸리고, 아이를 교육시키는 그들만의 능력이 담겼으면 한다.  


코끼리 식당 사장님이었던 그녀는 어디에 살든, 최고의 쌀국수를 팔아 코끼리 몸집만큼이나 큰 돈을 벌었으면 좋겠다. 세계 3대 쌀국수집을 베트남이 아닌 대만이나 한국에서 만나게 될 날도 머지 않을 것이고, 그 일을 그녀가 해낼 수도 있겠다고 상상해 본다. 착하고 성실한 그녀는, 충분히 그렇게 될 자격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

대만 자료는 강숙운 씨의 도움을 받았으며, 대만 귀화자 관련 그래프는 강숙운 양이 직접 작성했음을 밝힙니다.

조영미의 자료에 수록된 이미지는 핀터레스트(https://www.pinterest.com/)가 그 출처임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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