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보니, 대만]대만 이웃과 살아남기
드디어 학교 기숙사 생활을 청산하고 학교 밖으로 이사했다.
학교 안에 사는 건, 여러모로 편리했다.
첫째, 문제가 있으면 학교 직원들에게 즉시 알리면 됐고, 청소해 주시는 분이 현관 앞을 비롯해 곳곳이 청소도 해 주고, 쓰레기도 처리해 주셨다.
둘째, 교실까지의 거리가 5분 이내다. 학교가 작은 이유도 있지만, 집에서 학교까지도 아닌, 집에서 교실까지의 거리가 짧아 편했다.
셋째, 대만 상황 및 중국어를 잘 모르는 상태였으니 기숙사 거주는 여러모로 심신의 안정을 주었다.
그러나
일이 년이 지나자 학교 내 거주는 몇 가지 불편이 있었다.
첫째, 시끄럽다. 학생들은 저녁 때나 주말에-하필이면 우리 기숙사 앞 광장에서-노래하고 춤추고, 심지어 탭댄스까지 한다.
둘째, 일과 사생활의 분리가 안 된다. 나는 이미 퇴근했으나, 여전히 학교에 있었으므로 퇴근은 퇴근이 아니었다.
이러한 이유로, 3년차가 된 시점에서는 집을 천천히 알아보기 시작했고, 내가 근무하는 학교 졸업생이 졸업 후 카오슝에서 일하다가 고향인 타이베이로 가게 되어 집을 비워야 한다는 ‘기쁜 소식’를 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월세로 지금의 집에 들어오게 되었다.
25평형, 방 두 개짜리였다.
대만의 월세는 생각보다 유용했다.
가장 좋은 점은 가구나 가전제품이 모두 구비되어 있다는 점이다. 모든 집이 그렇지는 않지만 대부분 그렇고, 만약 필요한데 없는 물품이 있다면 집주인에게 사달라고 요구할 수도 있다. 나 같은 경우에는, 남학생 혼자 살던 집인데 생각보다 무척 깨끗했고, 이는 본인의 깔끔한 성격과 집에 잘 머물지 않는 생활 습관, 이 두 가지가 충족되어서인 것 같았다.
예전 기숙사에도 모든 생활물품이 구비가 되어 따로 살림살이를 구비하지는 않았다 (이 시점에서 나는 살림살이를 너무 구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또 알게 되었다. 새집에 들어왔을 때, 집에 침대시트와 이불이 없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좀 당황했다).
우리집은 15층인데, 네 가구가 함께 산다.
바로 옆집은 신혼부부가 산다고 들었는데, 어찌나 조용한지, 또 현관 앞은 사람이 전혀 드나드는 것 같지 않게 정리가 되어 있는지, 인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문제는 앞집이었다.
한 집은 대만 가족, 다른 한 가족은 미국 가족이 산다. 공통점이라면, 두 집 모두 미취학 아동이 둘씩 있다는 점이었다!!
집을 계약하기 전, 집주인에게 물었다.
“우리 아이가 고3이라 좀 조용했으면 하는데요, 앞집에 아이들이 있어 좀 시끄럽지 않은가요?”
“아니요. 전혀요. 애들이 왔다갔다 할 때 빼고는 조용합니다.”
나는 그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가 집에 있는 시간이 아이들이 취침할 시간이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카오슝이 지난 몇 주간 폭우로 고생했고, 이틀 간은 휴교령이 내렸다. 카오슝 시민은 시정부가 보내는 안내 문자와 뉴스를 수시로 점검하며 외출을 삼갔다.
그러나 내게는 “호우특보”보다 무서운 대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우리 앞집이었다!
집에만 있는 아이들은 내내 괴성을 질렀다.
몇 번은 신나서, 몇 번은 짜증이 나서, 몇 번은 제 형제자매와 싸우다가였을 것이다.
아이들이 괴성을 지르면 엄마들도 참다 못해 소리를 지른다. 중국어와 영어로 양쪽 집에서 들려오는, 즉 이중언어가 지원되는 서라운드 시스템인 엄마들의 고함은 너무나도 귀에 쏙쏙 잘 들어왔다.
그들의 말은 이러했겠지.
“좀 그만하라고 했지?”
혹은
“이제 좀 가만히 있으라고!!”
공룡이 되어 쿵쾅거리며 괴성을 지르는 네 명의 미취학 아동들과 내내 집구석에서 하루를 보내던 엄마들도 이내 입에서 불을 뿜는 공룡이 되어 버렸다.
아… 그들의 <쥬라기 월드>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충분히 머릿속에 그려졌다. 이해할 수 있지, 저 또래 아이들을 키우려면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입에서 불을 뿜겠지, 하지만 내 아이는 지금 고3인 걸. 도대체 시끄러워 애가 공부를 할 수 없잖아. 가서 한 마디할까? 경비 아저씨한테 가서 저 집 애들 좀 조용히하라고 해달라고 할까? 그냥 참을까? 참기엔 너무 시끄럽잖아. 하루이틀도 아니고, 아…
이렇게 고민만 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아이들은 여전히 시끄럽고, 엄마들은 오다가다 만나면 입까지 다크서클을 하고 내게 인사를 건넸다. 하루는, 대만 엄마가 집 문 앞에 놓인 유모차에 아이를 앉히고는 안전벨트로 아이를 묶어 버렸다. 아이는 다리를 위아래로 휘둘렀고, 엄마는 무표정한 얼굴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매정한 엄마이군…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엄마는 청소 중이었다. 하루는, 엘리베이터에서 미국 엄마와 두 아이를 만났다. 나는 그들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에서 1층까지 내려가는 내내 위협감을 느꼈다. 4살, 5살의 남매는 서로 멱살을 잡으며 대화중이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엘리베이터가 흔들렸다. 엄마는 아이들을 말리며, “얘들아, 우리 새 이웃인데 인사를 먼저 하면 어떻겠니?”
라고 애써 부드럽게 말했으나 아이들은 엄마를 쳐다도 보지 않았고, 엘리베이터는 여전히 흔들렸다.
나는 이 이웃들과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어젯밤에도 어김없이 들려오는 작은 공룡들의 외침을 들으며 깊은 상념에 빠졌다.
대만에 오자마자 알게 된 한국 여성이 있다. 전기밥솥이 필요한 내게 제가 쓰던 밥솥과 기타 물품을 중고로 넘겼는데, 그 이후로도 종종 그녀는 내게 대만생활에 필요한 정보나 물품을 건네주곤 했다. 그녀의 남편은 대만인이고, 처음 만났을 때 그녀는 임신 중이었고, 그녀가 첫아이를 낳자 나는 대만 산후조리원에 방문할 기회를 가졌고, 이후 아이의 첫돌도 축하해 줬다. 그 아이는 이제 한국 나이로 3살이 되어 기특하게도 제가 타는 유모차를 손으로 밀 수 있을 만큼 쑥쑥 컸다. 매번 나를 도와준 그녀에게 너무 고마워, 그 아이에게 줄 선물로 인터넷서점에서 동화책을 찾아보았다. 한국에서 파는 동화책을 읽은 지 오래 되어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내가 우리 아이가 어렸을 때 함께 읽은 책을 정리한 블로그가 어딘가에 있다는 걸 떠올리게 됐다. 그걸 보면 좋은 동화책을 추천해 줄 수 있겠군, 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의외의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8987721566
(엄마, 본문을 읽어 준다.)
소새는 설질이 좀 괴팍하여 인정이 없고 야박스런 구석은 있었으나 본래 재치가 있고 부지런해서 제 앞길 하나는 넉넉히 꾸려 나가고도 남았습니다.
아이: 엄마, '괴팍하다'가 뭐야?
엄마: 음......그건, 화를 잘 내고, 화 낼 때 막, 뭘 던지는 사람을 괴팍한 사람이라고 해.
아이: 엄마 같은 사람?
엄마: ......
아이: 엄마, 엄마는 원래 오십 점인데, 아까 성질 내서 지금 몇 점인 줄 알아?
엄마: 몇 점이야?
아이: 29점. 조심해. 1점이 되는 수가 있어.
(엄마, 본문을 다시 읽어 준다.)
딱한 건 왕치였습니다.
파리 한 마리 건드릴 힘도 없는 약질이라서 매일 놀고 먹었습니다. 놀고 먹으면서도 뱃속은 커서, 먹기는 남 배나 먹었습니다. 그것도 염치 아닌 노릇인데, 속이 없고 성질까지 불량했습니다.
아이: 불량이 뭐야?
엄마: 바르지 못 한 거. 불량 학생, 하면 좋지 않은 학생을 말해.
(엄마는 읽기를 잠시 멈추며 아이의 눈치를 살핀다. 아이가 혹시 자기를 '불량 엄마'라 하지는 않을까 내심 걱정하며…)
아이: 뭐해? 계속 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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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하>> <<레디메이드 인생>> 등 우리가 국어 교과서를 통해 공부했던 채만식의 우화입니다.
인물의 성격, 그에 걸맞는 행동과 심리 묘사가 탁월한 작품이에요.
아이들과 성격에 대해 이야기할 때, 좋은 작품이죠.
조심하세요!
엄마가 희생양이 될 수도 있으니까.
저처럼요.
나는 한 때 100점 만점에 29점짜리 엄마였다!
사유는 "괴팍한 성질"이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 엄마는
계획에 없던 자기 반성의 시간을 통해,
앞으로
앞집 아이들과 엄마들과 잘 지내 봐야겠다고,
조금은 착한 마음을 먹었다.
십여 년 전, 아이와 함께 책을 읽으며 나눈 대화를 정리한 글을 공개합니다~
http://blog.aladin.co.kr/koreacym/category/2109169?communitytype=MyPaper
* 배경 이미지 출처: 핀터레스트 https://www.pinteres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