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일 년,
벌써 일 년이라고 써야 하나, 벌써 사 년, 아니 오 년이라고 써야 하나.
셈에 느린 나는 연도를 따져보고 있었다.
브런치 글쓰기는 일 년만이다. 대만 거주 기간은 만 사 년이었다.
치열하게 보낸 작년 봄이 지나고, 여름이 지났고, 한국의 단풍을 사 년 만에 보게 되었고, 거리에 쌓인 눈은 보지 못했다.
2019년 6월 말에 나는 대만 생활을 모두 정리했다.
정리, 말 그대로 끝이었다.
집도 계약을 마쳤고, 학교에는 퇴사를 알렸다.
아이는 대학 입학 일로 6월 초에 한국으로 먼저 들어갔고, 나는 몇 년간 쌓인 짐을 버리고, 또 버렸다. 짐을 정리하는 일은 마치, 기억도 나지 않는 행사 자리에서 기억도 나지 않은 사람의 명함을 보는 일 같았다. ‘이 공책은 어디서 받았지?’, ‘이 바지는 언제 한국에서 갖고 왔지?’ 난 그렇게 내 거 아닌 내 거 같은 썸씽들을 들어보며 짐을 쌌다.
대만 생활을 정리하기로 결심한 이유는 단 하나, 가족이었다.
아이는 미국으로 대학을 가게 되었고, 남편은 내내 한국에서 기러기 생활을 했고, 나는 대만에 있었다. 적어도 작년 6월의 어느 날들은 삼 개국에 세 사람이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대만에 남아 내가 애초에 계획한 목표를 ‘달성’하고 가리라는 굳은 결심도 했으나, 그 마음은 외로움 앞에서는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대만의 장마철에 쏟아 붓던 세찬 빗줄기 때문이라고도 해 보았다. 대만의 장맛비는 소리만 들어도 아프다. 혼자 창 밖을 내다보며 그 비를 보고 있으면 가슴이 쓰리기도 하다. 나는 그 마음을 낮술로 다독였다. 나에게는 가족이 필요했다.
지난 4년 간의 대만 생활을 그려보면 외로움이 떠오르는 것은 사실이다. 말이 짧은 외국인이 객지에서 연고 없이 노동자이자 부모로서 산다는 것은 지금까지 내가 한 일 중에서 가장 무모하고 보람된 일이었다. 무모함 속에서 보람을 찾는 이들은 적지 않다. 외로움에 몸부림치다가 문득, 웃는 일이 생기면 그러하다.
나에게 웃을 일을 만들어 준 이들, 그들과의 헤어짐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브런치를 통해 내내 알려 준 따뜻한 대만 친구들의 모습이 하나씩 스쳐갔다. 또한 대만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 주며 관심을 보여준 독자분들-비록 뵙지 못한 분들이지만-이 떠올랐다. 브런치에 글쓰기는 나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예상하지 못한 전염병으로 해외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가족과 떨어져 있는 분들의 마음이 그려졌다. 객지 생활에서는 숨만 쉬고 있어도 힘들 때가 있다. 지금은 숨쉬기도 쉽지 않은 시기이다. 그 누구도 마음 편히 만나기 어려운 시기이기도 하다.
오늘 서울에도 간만에 봄비가 내린다. 창 밖을 내다 본다. 장맛비를 보며 낮술을 마셔 몽롱해진 내 모습이 비쳤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빗소리를 맞고 있을 친구들도 보인다.
<대만에서 살아남기> 이야기는 여기서 마무리해야겠다. 나는 대만에서 살아남았고, 다시 <한국에서 살아가기>를 시작했다. 내 모든 생활이 리셋되었다.
<추신>
제 대만 생활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브런치를 떠나 있는 것이 무엇보다도 구독자분들께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제 대만생활이 현재 진행 중이 아니라 과거가 되었음을 알려 드려야 했습니다.
객지 생활로 울고 웃는 순간들을 함께 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앞으로 다른 글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