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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May 27. 2020

남자들에게는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여성의 일상에 함부로 침범하는 남자들

드라마 <부부의 세계>의 마지막, 남편이었던 이태오(박해준 분)를 떠나서 자유로워진 여다경(한소희 분)이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 그때 한 남자가 갑자기 다가와서 커피를 책상 위에 내려놓고 자신의 자리로 간다. 맞은편을 쳐다보니 남자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인사를 한다. 시청자들이 새로운 관계인건가? 생각하는 찰나에 여다경은 책을 정리해서 일어나서 도서관을 나간다. 물론 받은 커피도 그 자리에 그대로 둔다.


이 장면은 여다경이 '부부의 세계'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부의 세계 속 남자들은 '관심'이나 '애정'을 이유로 여성의 일상과 그 일상을 영위하는 공간을 아무렇지 않게 침범한다. 전 남편(이태오)이 미행하고, 이혼절차 밟는 동안 별거중인 남편(손제혁)이 시도때도없이 찾아오고, 스토커(하동식)가 일터에서 물건을 던진다. <부부의 세계>의 배경이되는 지역인 '고산'의 여성들은 이런 남성들의 침범에 정신적으로 휘둘리면서 고통받는다. 반면 고산을 벗어난 여다경은 아예 '철벽'을 치며 남자가 자신의 일상을 건드리는 것을 거부한다.


나는 그 장면을 보며 '왜 남성의 호감 표시나 구애는 왜 여성의 일상적인 공간을 침범하는 식으로 이뤄질까'라고 생각했다. 해당 장면의 경우는 그래도 상황이 나은편이지만, 일명 '도서관 헌팅'의 경우에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계속 지켜봤다"며 '연락처'만 남기고 가는 경우도 많다. 이뿐만이 아니다. 네이트판을 보면 "오실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라는 쪽지를 남겨놓는다든지, 아버지뻘 남자가 대뜸 '정신적 교감'을 나누자고 한 케이스도 있다. 이런 경우 여성은 익숙한 자리를 떠나서 다른 자리로 옮기거나, 심지어 도서관을 옮기기도 한다. 신경쓰이고 부담되기 때문이다.


<부부의 세계 >16화에서 여다경이 도서관을 떠나는 장면


그런데 남성들은 자신의 행동이 여성의 일상적 공간을 침범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둔 적이 있을까? '진심', '용기' 등의 말로 미화되고 있지만, 사실은 매일 공공도서관에서 시험 준비를 하는 이들이 정체 모를 이의 쪽지를 받는 것은 대부분 달갑지 않은 일이다. 쪽지를 준 개인이 실제로 나쁜사람인지, 좋은 사람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여성들은 자기자신과 주변의 경험에 근거해,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되면 이로 인해 계속 구애를 받거나 위협당할수도 있다는 우려가 생길수밖에 없다. 어떤 경우엔 나의 '관심'이 상대방의 일상을 위협하는 '소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도서관의 예를 들었지만 사실 여성들은 어디서든 남성의 '작업' 대상이 된다. 어디서 만났는지, 어떤 관계인지, 내(남성)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내 '마음'이 그 모든 제약들을 초월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것이 사람의 마음을 얻는 행위가 아니라, '성적인 대상'을 향한 일종의 '작업'에 더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한 수능감독관은 수험생의 개인정보를 확인해 "마음에 든다"며 '연락을 했고, 민원실에서 일하는 경찰은 면허증을 발급해준 여자민원인에게 "마음에 들어서 연락하고 싶다"고 문자를 보내 논란이 됐다. 한 달동안 청년임대주택 관리인을 했던 50대 남성은, 입주자인 20대 여성의 개인정보를 취득해 유자차 택배를 보내고, "사랑한다"고 말해 언론에 알려진 일도 있었다. 혹자는 이를 극단적인 사례라고 말하겠지만, 비슷한 사례(동의 없이 전화번호를 구해 연락하는 것)는 여성들에게 종종 발생한다.


어쩌면  '마음에 든다'는 마법의 말일지도 모른다. 무례함을 넘어 범죄에 준하는 행동도 '용기'로 둔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음에 들게 하겠다'가 아니라 '마음에 든다'이기 때문에 문제다. '호감을 표하는' '진심을 전하는' 나의 모습에 도취해버리기 일쑤다. 그래서 '동의'를 얻지 않고 상대방의 일상에 물리적으로 침입하기도 한다.


일터에서 구애를 펼치고, 집 앞까지 찾아오고,대뜸 일과시간 외에 만나자거나 보고싶다는 연락을 취하고, 그것을 '로맨스'로 포장하는 남자들이 있다. 거절하거나 차단해서 끝날 정도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끈질기게 '접점'을 만들어서 다가오는 남자들을 말릴 방법이 없다. 정도가 약한 스토킹은 처벌도 어려워서, 불쾌함을 그저 견뎌야 하는 상황에 놓인다. 인적 네트워크 안에 있거나 내가 속한 조직의 윗사람일 경우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매번 완곡한 거절만을 반복해야하며, 일상은 고통스러워진다.


물론 남성들은 모두  '낭만적 사랑'을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가부장제 사회에서 자라온 남성들은 낭만적 사랑의 롤모델이 부재하다. 낭만적 사랑이 유지될 수 있는 근간인 '평등한 관계'가 불가능한 구조에서 살고 있어서다. 그래서 마초스럽게 '쟁취'하거나, '힘'(지위나 경제력)으로 사로잡거나, 그게 아니면 정반대로 자기연민을 가득 안고 '내가 희생한다'는 마인드로 여성과 관계를 맺으려 한다. 어느 것도 여성 입장에서는 반갑지 않다. 그런 식의 관계맺기에선 여성의 '의사'가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 대 사람으로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관심을 표하고, 점차 친밀감을 키우고, '환대'를 받으며 상대방의 일상속에 자리잡는 것, 물론 쉽지 않은 과정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어떤 동의도 받지 않은채 여성의 일상 한 구석에 침범해서 '압박'하는 것이 하나의 전략처럼 여겨져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 사랑이 사람의 마음을 얻어내는 과정이라면, '불청객' 혹은 '침입자'에게 마음을 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한국의 '남성문화'가 마음에 드는 이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크'를 하는 법을 가르쳤는지 의문이다. 노크 대신 몰래 들어가거나, 문을 부수는 것이 더 손쉽고 효과적임을 이야기해왔는지도 모른다. 나아가 자신이 노크를 할 수 있는 사람인건지 (혼인여부, 나이차, 위계 등을 고려해), 노크를 해도 괜찮은 때인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과정을 외면해왔다. '마음에 들어서'라는 일방적 '관심 표현'이 남성들에 의해, 미디어에 의해 마냥 낭만화되는 동안에 그것이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은 은폐됐다.  


그래서 이제 남성들에겐 '거리두기'가 필요하다. 자신의 '관심 표현'이나 구애의 과정이 여성의 일상을 침범하지 않는 방법을 고민하고, '동의'를 지속적으로 얻어내면서 서서히 거리를 좁히는 과정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발을 맞춰가야 한다는 이야기다. 자신과 상대방의 거리가 어느 정도인지도 가늠하지도 못하는 남성에게, 일단 '용기를 내라'고만 부추겼던 남성성은 폐기되어야 맞다.


'평등한 관계'에서의 '낭만적 사랑'이란 말로만 되지 않는다. 충분한 존중과 이해, 타인이 성실히 가꾼 일상의 안정성을 깨지 않는 것, '나'라는 존재가 상대방에게 스며들 수 있는 준비시간을 갖는 일이 필요하다. 남성들이 과거처럼 사랑을 명목으로 '침입자'가 되지 않기를, 조급해하지 않고 기다리기를, 경청하고 고민하기를 바란다. '노크'는 한 번으로 끝나는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함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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