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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Jul 07. 2020

'위력'을 보았다

그들의 조문이 피해자에게도 '단순한 추모'로 여겨졌을까?

'대통령 문재인'이라고 쓰여 있는 조화가 놓인 빈소에는 국무총리, 여당 대표와 차기 대권주자, 서울시장, 각 부처 장관등의 릴레이 조문이 이어졌다. 18개의 상임위원장을 모두 차지한, 민주화 이후 단일정당 최대의석을 차지한 거대여당의 의원들도 너도나도 방명록에 이름을 올렸다. 아마 이렇게만 묘사하면 이름 꽤나 날렸던 원로 정치인의 본인상이나, '실세 정치인'의 부모상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오늘 뉴스를 본 이들은 안다. 그곳은 위력 성폭력으로 3년 6개월의 징역을 받고 복역중인 안희정씨 어머니의 빈소였다.


성폭력 범죄자 친구를 둔 적이 있는가? 나는 없다. 있다면 인연을 끊어버리고 싶을 것 같다. 그래서 조문을 가는 정치인들의 기분이 어떤지도 잘 모르겠다.  '죄는 미워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건지', '정치적 의리'가 성폭행 같은 중범죄마저 덮어버릴 수 있는건지 추측하기 어렵다. 그들에게는 여전히 안희정씨가 '챙겨줘야 하는 우리 식구'인걸까? 


민주당이 '조문 원칙'을 정하고 조용히 왔다가기만 했어도, 과거 정치적 동지의 어머니를 향한 '순수한 추모'라고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웬걸, 대통령, 국회의장, 여당 대표, 여당 원내대표 등이 모두 조화를 보내고, 몇몇 정치인들은 기자들 앞에서 안희정의 '말'을 전하고, 심지어 울먹이기까지 했다. 기자 앞에 선 정치인들은 대부분 안희정씨를 안쓰러워 했다. 모친상을 당한 안희정이 아니라, 교도소에 있는 안희정에 대한 안쓰러움이었다. 


뉴스에서 나는 '위력'을 보았다. 그래봤자 눈짓 헛기침 그리고 '...'만으로 자신이 원하는대로 할 수 있었던 그 '위력' 의 일부겠지만 말이다. 유력 차기 대권주자였던 안희정씨는 모든 공직에서 쫓겨나고 성폭력 가해자로 징역형을 살고 있음에도, 모친상에 대한민국의 권력자들을 모두 불러모았다. 피해자의 자유의사를 제압하고, 피해자의 신고를 막았던 그 힘은 아직도 유효했다.


"안희정을 24시간 수행하며 나는 수시로 경찰 고위 간부의 전화를 지사에게 연결해주었다.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을 만나고 있는 지사를 수행하고 있었고, 대통령과 만찬을 하고 있는 지사를 청와대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지사에게는 일상인 그런 대화와 만남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며 그가 가진 권력을 항상 다시 실감했다. 나는 그와 싸울 수 없음을, 내가 겪은 것을 어느곳에서 상의할수 조차 없음을 알았다. 내가 신고한다면  그 신고를 받게 될 사람들은 안희정과 관계를 갖고 있는 이의 부하 직원들일 것임을 알았다." - 책 <김지은입니다> 중 


떠들석한 조문행렬,  '공식직함'으로 온 조화들, 안희정씨에 대한 안쓰러움을 표하는 인터뷰 등... 성폭력 가해자의 건재함을 입증해준 그들의 행동을 보고 피해자는 어떤 생각을 할까. 안희정씨는 권력을 잃었지만, 그를 보러 오는 권력자들은 한 국가를 좌지우지하는 이들이다. 상황이 이런데 대체 피해자가 어떻게 스스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유독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 대한 2차가해성 댓글이 많은 이유를 알것 같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안희정씨에 대한 동정심까지 유발하는 사실상의 2차가해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민 인식이 쉽게 바뀔리가 없다. 권력의 최상층부에 있는 사람이 여전히 '성폭력'을 '성폭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렇듯 남성중심의 한국 정치가 위력 성폭력에 대해 어떤 문제의식도 못 느낀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아마 정치인들 개개인은 '인간적 도리'를 다한다고만 여길 것이다. 그런데 그 '인간적 도리'가 누군가에게는 어마어마한 사회적 위협이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언론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다. 안희정씨 어머니의 빈소를 취재하던 몇몇 언론들은 정치인들과 공범이다. <정치권 조문행렬…안희정, 눈물 떨구며 "미안합니다">(연합)은 안희정씨가 조문 온 정치인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전한다. 안희정씨에 대한 동정여론을 자극하는 보도다. 심지어 전재수 의원이 '희정이형'이라고 부른 것까지 전한다. 안희정씨가  '피해자가 있는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안희정, 모친 빈소서 '눈물'…이해찬·이낙연 등 與 조문 행렬>(뉴시스)도 앞서 연합뉴스 보도와 비슷하다. "수척해졌다 "여위었다" 등의 정치인들 반응을 그대로 전했고, "대학 시절 은사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를 만난 자리에서는 눈물도 쏟았다"는 말까지 전했다. 성폭력 가해자인 그는 기사 속에서 그는 '불쌍하고' '안쓰러운' 존재처럼 묘사되고 있었다.


적어도 눈치는 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신의 위력을 인지하지 못하고 '내 친구'라는 이유로 조문을 가서 함부로 '동정'의 말을 남기는 정치인들, 그걸 토대로 안희정씨를 불쌍하게 묘사하는 언론사 기자들. 그들은 자신의 행동이 안희정 성폭력 사건의 피해자에게, 또다른 성폭력 사건들의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를 지원하는 이들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갔을지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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