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아내나 여자친구에게 잡혀산다고 말하는 남자들이 참 많다. '잡혀산다'는 것이 대체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자신을 대외적으로 관계의 약자로 두면서 '불쌍한 처지'에 있다고 호소한다. 이는 꽤 오랫동안 남성집단에서 공유되어온 ‘유머코드’기도 한데, '잡혀산다'는 말이 유머가 될 수 있다는 점이 역설적으로 남성의 젠더권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여성이 '잡혀산다'는 말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는가? 극히 드물것이다. 여성에게 '잡혀산다'는 말은 사실상 억압과 굴종의 상태에 있다는 말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다. 여성은 실제로 '잡혀사는' 상태에 놓이더라도 절대로 '잡혀산다'고 동네방네에 말할 수가 없다. 그를 잡고 있는 남성이 여성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스스로 '잡혀산다'고 말하는 수천수만명의 남자들이 실제로 잡혀산다면 대체 어떻게 동네방네 '나 잡혀삽니다' 떠들 수 있단 말인가. 말 하나하나가 전부 아내나 여자친구에 대한 푸념이나 비난에 가까울텐데 말이다.
특히 중년 남자들이 '나 잡혀살아' 혹은 '요즘은 여자들 팔자가 더 좋아'라고 이야기하면서 스스로를 '피해자화'하는 행태는, 2030 안티페미니즘의 기저에 있는 '남성 약자론'과 얼마나 다른지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둘 다 '엄살'이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남자들의 '잡혀산다'는 근거는 어떤 행동을 '통제'당했다거나, 부당해보이는 '요구'를 들어줬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사실 아내나 여자친구가 통제하고 부당한 요구를 관철시킬 '위력', '강제력'이 있는 사람인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 반대의 경우는 꽤나 있을지 모르겠지만.
대화로 해결하면 될 문제들을 일부러 '힘든 척'을 하기 위한 이야깃거리로 삼는다는 인상까지 종종 받는다. 아내를 떠받들라고 아무도 요구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떠받들며 살고 있다는 자의식을 갖는다. 그렇게 관계에서 '약자'의 자리를 점유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부장의 권력을 갖고 있는 자신의 위치와 전치시킨다. 약자와 강자의 위치를 집단적 '찡찡거림'으로 표면적으로나마 뒤바꿔 버리는 것이다.
약자가 아닌 사람이 약자 행세를 하면, 상대방은 '가짜 강자'가 된다. 그런데 '가짜 강자'는 불리하다. 실질적인 힘이 없는 상황에서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설득하면, 상대방은 의견을 수렴하는 게 아니라 '척'을 하면서 무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힘든 척', '열심히 한 척', '기죽은 척'. 남성은 그렇게 약자인 척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힘을 마음껏 과시한다. 가부장의 권력을 교묘한 방식으로 지켜내는 셈이다.
흔히 남자들이 '여자들이 잔소리가 많다'고 투덜대고, 심지어 '억압'의 상징처럼 이야기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한 공간을 쓰거나, 함께 행동을 할 때의 기본적인 예의나 규칙을 누가 쉽게 어기는지 봐야 한다. 한국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철이 없어도' 괜찮은, '눈치를 덜 봐도' 되는 존재는 누구일지 생각해보면, '잔소리로 고통' 운운이 얼마나 남성중심적인 시각인지 알 수 있다.
가부장의 권력은 본질적으로 '말할 수 있는 권력'이 아니라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권력'이다. 가부장제의 상징은 '근엄한 아버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가족들은 아버지의 눈치를 보면서 비위를 맞췄고, 구구절절한 설명이나 설득 없이도 자신의 뜻을 관철할 수 있었다.
시대가 변해서 이제 남자들은 더 이상 '근엄한 아버지'로 존재할수 없다. '가부장'에서 내려와서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말하는 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런데 상당수의 남성이 택한 길은 스스로를 피억압자로 위치시키는 황당한 방식이었다. 스스로 '잡혀산다'라며 여성의 말과 행동을 과도하고 비인간적인 것으로 폄하하고, 자신은 관계에서 어떠한 의무나 책임을 다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교묘하게 드러내는 행태다. 그들은 스스로도 모르게 가부장제를 지탱하는 전략을 수행하고 있다.
무엇보다 '잡혀산다'고 너도나도 외치며 집단적 자기연민을 표출하는 이들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생각할 수가 없다. 자신 혹은 자신과 동일한 젠더와 세대와 직위를 갖고 있는 이들의 힘든 것만 보이니까. 페미니즘을 이해하고 파트너나 주변의 여성들과 공감할 수도 없음은 물론이다. 여성과 소수자의 억울함은 '피해망상' 소리 듣기 일쑤였는데, 남성의 억울함은 대체 왜 이리 힘이 세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