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불안은 어째서 '사소화' 되어야 하나
우연한 계기로 친구의 집에서 수십 개의 포장 비닐에 붙은 택배 운송장을 떼어낸 적이 있었다. 스티커화되어서 잘 떨어지는 형태가 있는가하면, 아주 잘 접착되어 있어서 결국엔 유성매직으로 그어버리는게 나은 쪽도 있었다. 택배회사가 연락처와 주소 등 개인정보는 암호화해야한다는 주장도 나오지만, 정작 업계에선 논의되고 있지 않는듯 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개인정보를 보호할 수밖에 없다.
특히 여성들은 주소와 연락처 노출이 큰 스트레스다. '생존'을 위협받을 수도 있어서다. "세 모녀를 살해한 김태현이 '택배 운송장'을 보고 주소를 알아냈다"는 보도가 나왔고 (이는 오보다. 운송장이 아니라 '배송 예정 문자' 캡처본을 보고 알아냈다고 한다), 한 여성은 운송장을 통해 주소와 연락처를 알아낸 전 남친(택배 기사)에 의해 언니가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국민청원에 올리기도 했다.
옆집 여성의 전화번호를 택배 운송장을 통해 알아내, 여러 차례 성희롱성 문자메시지를 보낸 70대 남성이 징역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한 인터넷 BJ도 택배 운송장이 노출돼 장난전화가 오고, 벨이 눌리는 등 사실상 스토킹을 당했다. 여성들은 공공장소나 길거리에서 불법촬영이나 성추행의 위협에 노출되는 한편, 집에서조차 '안전'을 보장받지 못하는 셈이다. 그래서 여성들은 '남성이 사는 것'처럼 집에 신발을 더 두는가 하면, 택배 수신자를 터프한 느낌의 남자 이름으로 지정하기도 한다.
애인의 집에서 배달 음식을 시켜먹을 때면, 주로 내가 음식을 받으려고 노력한다. 누군가를 의심해서가 아니라, 아무래도 남성이 있는 집이라는 인식을 주는 게 안전을 확보하는데 더 유리할 것 같아서다. 여전히 '여성 혼자' 혹은 '여성들만' 사는 집은 스토킹 등의 범죄의 표적이 될 가능성이 높고, 이는 여성혐오적 인식이 개선되거나 치안이나 공간 정책에 성인지적 감수성이 반영되지 않는 이상 쉽게 개선되기 어렵다. 현실적으로 더 안전해지는 방향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겨레 출판사가 <이만하면 괜찮은 남자는 없다>를 구입하면 개인정보 유출방지 스탬프를 주는 이벤트(https://www.aladin.co.kr/events/wevent.aspx?EventId=219843&start=pbanner)를 한다고 알려왔을 때, '괜찮다' 싶으면서도 내심 씁쓸했다. 잘 안 뜯어지는 운송장 위에 스탬프를 찍는, 또래 여성 친구들의 일상적 불안이 그려졌다. 어떤 남성들은 잘 모를 수 있지만, 범죄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행위들은 여성들에겐 매우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같은 공간에서 겪는 여성과 남성의 경험은 다르다. 주거 공간뿐만 아니라 남성에게는 자유롭고 편안한, 시선이나 분위기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는 공간이 여성에게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을 추모하지 않는 정치인과 '추모 페이지'에 와서 테러를 하는 남성들이 황당하고 분노스러운 이유다.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스토킹, 괴롭힘, 성폭행, 살해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마저 부정하면, 대체 무슨 대화와 소통이 가능할까. 운송장 위에 한참을 개인정보 보호 스탬프를 찍고, 이름을 바꿔서 택배를 받고, 늦은 밤 뛰어서 집에 들어가는 그 마음을 알기 위해 노력이나 해봤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