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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Oct 02. 2018

남자들의 '집단적 자기 연민', 왜 문제일까?

여성과 약자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고, '나'만 힘든 줄 안다. 


한국 남자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은 '집단적 자기 연민'이다. 이들은 언제나 자신을 '피해 보는', '약자의' 위치에 놓으며 스스로의 악행 혹은 찌질한 행동을 정당화시킨다. 그러면서 정작 자신의 '강자성'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니 더욱 문제다. 김수아 교수는 인권위 토론회에서 이런 한국 남성들의 자기 연민을 지적한 바 있다.


"스스로를 '서열경쟁에서 밀린 남성 약자'로 규정한 남성들이 '왜 여자가 피해자인 척을 하느냐'며 페미니즘을 거부하는 것. 이들은 '피해자 남성'과 '소수의 권력자 남성'을 나누고, 미투 운동도 남성의 문제가 아니라 일부 권력의 문제라고 해석한다"

여자들은 경쟁시장에 진입조차 못했는데, 남자들은 경쟁에서 최상위에 오르지 못했다고 자기들을 엄청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로 여긴다. 이런 경쟁의 요소엔 승진, 외모, 학력, 결혼 유무, 재산, 명예 등까지 포함된다. 개중 하나만 모자라도 자기들이 불쌍하다고 난리다. 가족이든 친구든, 혹은 이 사회 전반이 '괜찮다'면서 부둥부둥해주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자기 연민이 없으면 오히려 재수없는 것으로 간주되는 느낌이다.


자기 연민을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도취다. 객관적 위치를 망각하게 만들고,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면죄부를 부여한다. 동시에 주변으로부터 과도한 인정을 원한다. 자신의 삶에서 무언가 손해를 보고 있고, 희생하고 있다는 것을 누군가 알아주고 인정받는 게 이들이 자기연민을 드러내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억울함'에 공감을 못해주면 가족이든 애인이든 부하 직원이든 괴롭힌다.


심지어 그 '억울함' 중 가장 인정받고 '조장'되기까지 하는 것은 연애 혹은 결혼 못하는 남자들의 자기 연민이다. 사회적으로도 그들을 '제일 불쌍한 사람' 취급한다. 김제동씨는 자신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종종 "못생기고 연애 못해서 불쌍한 나"라는 콘셉트로 웃기려고 한다. 동년배 싱글 여성 예능인들이 그런 콘셉트를 잡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김제동씨처럼 똑똑하고 의식 있는 사람이 언제까지 "나는 불쌍한 사람이다"라고 외치고 다닐건지 의문이다.


SBS <미운우리새끼>도 비슷하다. 이 프로그램을 관통하는 정서는 "마누라가 없으니까 그 나이 먹고도 칠칠맞지 못하지"다. 최고의 인기가수였던 김건모가 졸지에 '결혼도 못하고 철없이 사는 중년 남성'처럼 등장한다. 이들은 이 프로그램에서 '결혼을 안했다'는 이유로 모든 철없는 행동에 대해 면죄부를 받는다. 그래서 웃음을 주긴 하지만, 그 웃음 속에 '남성들의 자기 연민에 대한 사회의 온정적 시선'이 담겨있는 것 같아 영 찝찝하다.



tVN <나의 아저씨>에선 중년남성들의 자기 연민과 그속에서 만들어지는 판타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황진미 평론가는 이 드라마에서 '기득권 아재들의 피해자 코스프레'와 민망한 아저씨들의 ‘자기모에화’(자기탐닉)가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스스로의 '불쌍함'을 마구 떠벌릴수도 있고, 심지어 탐닉할 수도 있으니 얼마나 편한 삶인가.


지난해 '페미니즘 마녀사냥'을 통해 작가를 쫓아낸 SBS <배성재의 텐>은 아예 '불쌍한 남자들'을 주요 청취차층으로 삼는 프로그램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스스로를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남자들'이다. 이 프로그램은 모쏠이나 연애못하는 남자를 핵심 키워드로 삼고, '비연애챔피언스리그'같은 코너를 통해 찌질하고 처참했던 자신들의 연애실패담을 공개하며 "너도 찌질했냐 나도 찌질했다"이러면서 위무받는다. 덧붙이자면 이러한 코드의 전제에는 '나를 만나주지 않는 여자'들에 대한 원망도 들어있다는 게 문제다.


그런데 왜 '불쌍한 여자들'은 없을까. 살면서 억울하고 힘든 점은 남자들보다는 여자들에게 더 많을 것이다. 여자들은 이것이 '분노'나 '화'로 표출될뿐, 자기 연민으로 표출되지는 않는다. 왜냐고? 이들은 자기연민을 표출해서 얻을 수 있는게 없기 때문이다. "억울했쬬요 우쭈쭈"는 어쩌면 다 가질수도 있었던 누군가가 무언가를 가지지 못했을 때 받는 위로와 인정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약자이며,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이가 '불쌍함을 전시'해봤자 "너만 힘들어?"라는 냉소를 받을 뿐이다.


남자들의 '자기 연민'이 여론을 만들면서 계속 여자들의 고통이 묻혀왔다. 이를테면 남자들은 "뼈빠지게 일하면서, 아내와 자식들의 비위를 맞춰왔는데, 정작 아침밥도 못 얻어먹고 다니며 자식들은 나를 외면한다"는 식의 '고개숙인 남자론'을 줄곧 주장해왔다. 남자들이 더욱 살기 팍팍하다는 식의 기사는 잊힐만하면 나왔다.

어떤 남성들은  '여성들이 더 살기 좋은 시대'라며 황당하게도 역차별을 주장하기도 한다.


그런데 남자들이 찡찡거릴 때 여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결혼하자마자 경력단절이 됐고, 독박육아로 아이들을 길러내다가 집안에서 돈 쓸 일이 많아지면 자신의 전문성을 살리지 못한채 비정규직 일에 뛰어들어야 했다. 일을 같이 하더라도 여전히 가사와 양육은 전부 여자의 몫이 됐다. 그밖에 가부장제의 속박을 견뎌내야 할 일이 어디 한둘이었겠는가. 이렇게 여자들은 자기 삶을 잃고 매일 고개 숙여왔는데, 사회가 집중하는 건 '남성이 기죽는 일을 막는 것'뿐이었다. 남성들은 사회가 이모양인걸 잘 아니까 자꾸 "내가 불쌍하다, 열심히 살았는데 억울하다" 이러면서 인정을 갈구하는거고.


특히 40대~50대 남성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권력을 많이 향유하고 있는 집단이다. 그런데 이들은 특히 자기연민에 집단적으로 도취되어있는 세대이기도 하다. 이런 사람들이 조직의 주류가 되니 "무슨말도 못하겠다"는 식의 펜스룰과 '꽃뱀론'이 횡행할수밖에 없다. 어쨌든 "우리는 억울하다"가 그들의 머릿속에 박힌 생각이다.


정치학자 전인권씨가 <남자의 탄생>에서 지적한대로 한국 남자들은 '나'밖에 모르는채로, 자기중심적으로 성장해왔다. 나의 위치나 내가 갖고 있는 권력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나머지 자기연민에 빠져 남을 괴롭힌다. 부장이 부하 직원에게 사적만남을 요구한다는 것이 어마어마한 압박이며, '더러운 짓'이라는 걸 모른다. 군대간 것이 너무 억울한 나머지, 채용성차별이 빤히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역차별'을 운운한다.


'집단적 자기 연민'에 빠진 남자들은 결과적으로 페미니즘의 가장 큰 방해세력이 되면서 여자들을 괴롭히고 있다. 이런 남자들을 대체 언제까지 봐야 할까. 우리에겐 스스로의 주제를 파악할 수 있고, 자기 연민이 없는 '건강한 남성상'이 더 많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의 삶을, 특히 여성들의 삶을 상상해볼 수 있는 남성들이 늘어난다면 이정도로 엉망이진 않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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