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훈 Feb 20. 2019

임신중절, 뒷짐 진 국가와 무책임한 남성들

레이싱모델과 프로게이머 사이의 일, '가십'으로 넘어갈 일 아니다

한 레이싱모델이 8년 전 낙태 사실을 이야기하며, 유명 프로게이머와 만나던 중 발생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프로게이머는 "사귄 것은 맞으나 당시에는 낙태 사실을 몰랐다. 친구랑 가서 (태아를) 지우고 왔다는데 진짜인지도 모르겠다"고 반박했다.  


사실 관계를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여자 쪽이 (사귀는 도중 혹은 헤어진 직후에) 남자에게 이야기 하지않고 낙태 수술을 받은 것은 분명한 듯하다. 포털 여론은 대부분 레이싱 모델 쪽을 비난하는 분위기다. 갑작스러운 폭로뿐만 아니라, 아이의 아빠인 남자에게 이야기하지 않고 수술했다고 발언한 것이 '의심스럽다'는 지적도 있었다. 아래는 포털 메인에 실린 관련 기사 베스트 댓글 중 일부다.


"어느 날 갑자기 남사친이랑 와서 임신했다고 아기 지웠다고 통보함 = 남사친이랑 와서 통보했다는 것도 의심이 갈만한 부분이지만 중요한건 임신했을 때 바로 (프로게이머)한테 얘기안하고 혼자 일을 처리했다는 점. 입장 바꿔서 내가 여자라면 임신했으면 제일 먼저 첫번째로 털어놓고 얘기해야 되는 사람이 당사자인 (프로게이머)인데 남사친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게 의심되고 열받을일이다." 


당시에 낙태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을 '의심'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 남자들의 생각일 뿐이다. 결혼하지 않은 커플의 낙태 사례들을 보면, 옆에 있는 남자들이 대체로 별 도움이 되지 않고, 스트레스만 주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프로게이머는 어린 나이였다. 관계를 끝까지 지속할 게 아니라면 혼자 수술을 받는게 오히려 현명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만에 하나, 남자의 주변에 낙태 사실이 알려질 수도 있다는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프로게이머는 '멘탈'이 바로 성적으로 이어지는 직업일뿐 아니라, 숙소에서 단체생활을 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여자는 개인방송을 통해 "남자도 나도 꿈이 있었기 때문에 서로를 위해서 수술할 수밖에 없었다. (낙태는) 큰 일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 사례에서 이성애 관계의 극단적인 불평등함을 본다. 섹스를 하는 경우, 남성은 아무런 부담이 없다. 반면 여성은 상시적으로 임신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임신을 하더라도 남자는 아무 책임을 지지 않아도, 심지어 경우에 따라 아예 몰라도 된다. 그래, 이 불평등함은 생물학적인 원인에서 온다고 치자. 그렇다면 국가는 무엇을 해야 할까. 애초에 이런 불평등한 상황(원하지 않은 임신)이 발생하지 않게 피임을 장려해야 한다. 그러나 비교적 피임 확률이 높은 콘돔, 피임약, 미레나 등을 사용하는 ‘적극적 피임율’은 어떤 통계를 봐도 절반이 안 된다. 


그렇다면 원하지 않은 임신을 했을 경우 국가는 무엇을 하나. 불평등한 상황에 처한 여성을 도와주나? 아니 처벌한다. 현재 직접적인 처벌은 흔하지 않으나, 어쨌든 '불법'이라는 점만으로 낙태를 하려는 여성은 큰 압박을 받는다. 국가가 여성의 몸을 '불법'으로 만든 결과는, '낙태하는 여성'에 대한 사회적 비하와 비난으로 돌아왔다. 오히려 불평등을 가중시켰던 것이다.


KBS 주말 드라마 <황금빛 내 인생>의 한 장면. 극중 남자는 여자에게 낙태 수술을 받으려는 병원에 찾아와 '신고한다"고 협박까지 한다. 실제로 이런 경우가 꽤 있다.


정부 조사결과 15~44세 임신경험이 있는 여성 10명 중 2명(성 경험 여성 10명 중 1명 꼴) 낙태를 한다. 이중 절반이 미혼 상태에서 경험한다. 낙태는 흔한 일이다. 다만 그것이 불법이기에, 사회적으로 금기시되기에 드러나지 않으며, 드러나지 않기에 드러나면 삶에서 큰 위험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이 위험에서 당연히 남자는 자유롭다. 


여성들이 낙태 수술로 겪는 고통을 감히 내가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정리해보면, 육체적 고통만큼이나 여성들을 고통스럽게 했던 것은 낙태를 '불법', '숨어서 해야하는 것', '부끄러운 것'으로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었다. 게다가 이런 시선을 답습한 많은 남성들이 낙태를 '성적 문란함'의 상징인양 이야기하던 것은 여성들에게는 '공포'였을 것이다.


'낙태'에 대해 낙인찍고 비난한 대표적인 예는 2010년에 나온 래퍼 데프콘의 <그녀는 낙태중>이라는 곡에서 찾을 수 있다. 가사는 여성 BJ가 명품을 위해 어장관리를 하며 '별 생각 없이' 낙태 수술을 받는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실수를 가장한 그 팬티 보여주기란 

명품 백을 위한 현실의 아픔인가?

익숙해진 임신 앞에 첫 마디가 씨발! 

필 받아서 콘돔을 뺀 새끼도 씨발!

부랴부랴 헤드셋을 챙긴 채 

오늘도 씨발 놈의 풍선을 또 땡기네"


끔찍한 가사다. 단 한번도 삶에서 '원하지 않은 임신'의 위험에 노출되어보지 않은 남자가, 낙태수술받는 여성을 조롱하는 가사를 쓸 수 있었다는 것이 한국 사회에서 남성이 가진 젠더권력을 보여준다. 동시에 낙태죄가 여성의 몸을 규정하고 통제하며, (몸이 불법이 될 수 없는) 남성들에게 도덕적 우위까지 선사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의 '낙태죄 폐지' 청원 답변의 일부분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여성에게만 이중삼중의 고통을 가한다는 점에서, 당연히 낙태죄는 폐지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시작'일뿐이다. 일단 낙태가 불법이 아니어야, 어떤 논의든 가능해지니 말이다. 안전한 낙태 방법을 이야기할 수 있고, 궁극적으로는 섹스와 임신을 둘러싼 성별 불평등을 줄이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낙태죄가 없더라도 현대 노동시장에서' 임신'을 했다는 이유로, 아니 임신을 할 수 있는 몸을 가졌다는 이유로 받는 차별은 어마어마하다. 현재는 몇 겹의 차별이 여성의 삶에 덧씌워져 있는 셈이다.


여자가 왜 만나던 남자에게 말을 안 하고 낙태수술을 해야 했으며, 그 사실을 오랫동안 묻어둬야만 했을까? 이런 경우는 이 레이싱모델만의 특수한 일일까? 나는 두 사람의 일이 가십이 아닌, 사회적 문제로 여겨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검정치마 여성혐오 논란의 핵심: '홍대 인디신 남성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