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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May 04. 2019

페미니즘 시대의 사랑법

[서평] 사랑도 계약이다

"사랑해서 그런거야."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가해자들이 흔히 하는 말이다. 그들은 '사랑 만능론자'들이다. 사랑하면 뭐든 할 수 있고, 또 뭐든 견디고 참을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가해자들은 사랑이 '초법적'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과 맺는 관계의 궁극은 서로에 대한 온전한 소유권을 행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앞서 언급한것만큼 극단적이진 않지만, 한국 사회는 여전히 '사랑의 절대성'에 대한 환상이 깨지지 않고 있다. 사랑은 특수하고 특별한 가치를 지닌, 헌신과 희생을 통해서라도 지켜야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연애는 '상대방이 원하는 나의 모습 만들기' 과정이 되어버리고, 결혼은 '가족 공동체에 필요한 나의 모습 만들기' 과정이 되어버린다. 


물론 남성은 '사회생활' 혹은 '가부장', '남자'의 이름으로 그 모든 과정을 생략하기도 했다. 공고한 가부장제 사회에서는 사랑을 '지켜야' 할 의무는 대부분 여성에게만 부여됐다. 돌봄과 감정적인 위무를 담당하며 '온전한 남성의 것'이 되는 과정을 그동안 사회는 '사랑'이라고 불렀다.


사회가 변하고, 가부장제도 점차 깨지고 있지만 성 규범에 따른 '사랑공식'은 관습이 되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러한 이성애 연애와 결혼의 불평등함은, 현재의 '탈연애'나 '비혼' 현상에 기여한 바도 크다. 사실 '사랑한다'는 것은 주어진 의무의 이행이 아니라 매일매일 갱신되는 긴밀한 상호소통의 과정이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하는 연애와 결혼이 무엇인지 재규정될 필요가 있다.


박수빈 변호사의 책 <연애도 계약이다>는 연애를 계약에 빗대면서, 가부장제식 소유/비소유 관념이 지배해온 '연애'라는 관계에 대해 다시 해석한다. 연애가 계약이 되면 그 당사자들은 각각의 동등한 주체로서 인정받아 상대방을 교섭상대로 삼는다. 협상 과정에서 욕구가 경합이 이뤄지며, 그 속에서 합의된 룰을 지키려고 노력하며 신뢰를 쌓아 나갈 수 있다. 연애를 '계약'이라고 말하면 거부감을 느낄 사람도 있겠지만, 실상은 이렇게나 이상적일 수가 없다. 



"계약의 대전제는 계약을 체결하는 주체들이 서로 대등한 관계라는 것이다. 계약 당사자가 자신이 구속될 규칙을 스스로, 주체적으로 정한다는 뜻이다(270p)" 


이 책은 '썸'부터 이별에 이르기까지의 연애 과정을 다양한 법리나 판례, 법 조항등을 응용해 설명했다. 이를테면 썸을 타다가 헤어지는 것을 '계약 교섭의 부당한 중도 파기'에 빗대고, 잠수타기를 '이행 거절에서 갖춰야 할 예의'의 문제로 묘사했다.


이런 비유들은 그 자체로도 재미가 있지만, 무엇보다 연애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평등한 관계'를 기초로 한다는 점을 일러준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희생해왔던 부분도, '계약'이라고 생각하면 굳이 용인할 필요가 없어진다. 


"계약을 체결하고 상대방에게 대가를 받기로 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의 요구를 무한정 들어줄 필요도, 서로 약속한 것 이상을 무리해서 할 이유도 없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애초에 나와 연애를 하기로 해놓고, 나에게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고 외모를 꾸미기로 요구했다면 그 사람과의 연애는 끝내는 게 맞다(107p)

특히 3부 '이것은 연애가 아니다'에서는 젠더 폭력의 양상을 다룬 부분을 주목해야 한다. 이 부분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한 성적 행위,집착 등은 명백한 계약 위반일뿐더러 '범죄'임을 분명히 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섹스도 계약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 계약의 제1조건은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지 않게'일 것이다. 


남성들의 잘못된 통념 중 하나는 '호텔까지 같이 가면 성관계에 동의한다' 따위의 것들이다. 또한 섹스에 동의했더라도, 섹스도중 이뤄지는모든 행위에 동의한 것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성에게는 성적 자기결정권이 있다. 거부하면 멈춰야 하고, 필요할 경우 동의를 구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계약의 특징은 '융통성'이고 이를 지탱하는 '신뢰'다. 지금까지 쌓아온 규범이나 습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로의 기분이나 사정을 살피는 것이다. 계약 관계에 있어서 신뢰가 쌓이면 '물품 납기일'을 연장하기도 하는 것처럼(147p) 룰은 유동적일 수 있다. 심지어 가장 큰 신뢰관계를 바탕으로 하는 연인관계에서는 당연히 융통성이 필요한 것인데, 이걸 망각하고 과거의 행위나 룰만 고집하면 폭력이 될 수밖에 없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는 계약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을 커플들이 항상 인지하고 있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이 책은 관계에 있어서 '주체'로서의 나를 상기시키고, '더 깐깐해져라'고 요구하는듯 해 흥미로웠다. 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이뤄지는 희생과 헌신은 더 이상 요구하지도, 순응해서는 안 된다. 계약자는 누구보다 깐깐해야 하니까. 


다만 이 깐깐함이 연애와 결혼을 통해 '자신'을 잃어갔던 이들에게는 큰 힘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한다. 여성들이 가부장제가 만들고 강요해온 '사랑법'을 벗어나 연애에서 주체적인 목소리를 내는 데 도움을 주는 좋은 참고서가 나온 것같다.


그래서 <연애도 계약이다>가 '페미니즘 서적'임을 공표하지는 않았지만 그 어떤 책보다도 페미니즘을 잘 설파시킬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안전하고 자유로운 사랑을 위하여'라는 부제처럼 여성에게는 계약조건을 위반한 남자를 끊어낼 수 있는 단호함을 심어주고, 남성에게는 자신의 '관계맺기'에 대해 되돌아보게 만들 것이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은 여성분이라면 (이성애 관계를 맺고 있다면) 남자친구에게 이 책을 보여줬으면 좋겠다. 만약 '연애도 계약이다'라는 대전제에 동의한다면, 꽤 괜찮은 조건으로, 단단한 신뢰를 바탕으로 한 계약 관계를 형성할 수도 있다고 본다. 반면 '계약'이라는 관점에 대한 이해조차 거부하거나, '페미 묻었네' 식의 반응을 보인다면 계약 해지가 답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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