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훈 May 13. 2019

어떤 고백은 폭력이 된다

무례하고 불쾌한 고백이 정당화·낭만화 되는 사회

드라마나 만화에서의 고백은 낭만적이고 설레는 순간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실제 고백의 순간은 곤혹스럽고 불쾌하기 짝이없는 경우가 많다. 특히 고백하는 사람보다는 그 고백을 받는 사람입장에서 말이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지금껏 고백을 연애 시작의 올바른 방식으로 권하고 있다. 한 예로 김제동씨는 자신의 강연에서 '고백연애론'을 설파하고 다닌 적이 있다. 그는 "먼저 고백을 하되, 거절을 하면 바로 뒤돌아서 가면 된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강조한다. 또 자신도 20대로 돌아가면 그렇게 연애하고 싶다고 말한다.


"고백하고 사건 사고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20대 때는 충분히 그렇게 하고 살아도 전혀 지장이 없어요.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니면 어떤 것을 하고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 2012년 11월 27일 서울시립대 강의중 (http://bit.ly/UXnfXO)


그런데 과연 고백이 남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닐까. 물론 표면적으로는 고백은 단순히 마음을 표현하는 행위고, 거절했을 경우 순순히 물러나면 서로 아무 문제가 없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다. 김제동씨의 뜻과는 달리 '고백 권하는 사회'는 남자들에게 왜곡된 '연애관'을 심어주고, 여성들을 곤경에 처하게 하는 것을 넘어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다.


일단 흔히 '고백'이라고 일컫는 행위에는 두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 번째는 상호 감정 교환이 안 된 상태에서 "네가 좋다"라고 말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어떤 호감도 줄 수 없는 행위라는 점이다. 나도 중고등학교 때는 학교나 학원에서 대뜸 마음에 드는 친구에게 인형을 주거나 사탕을 준 적이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그들이 나에게 관심을 줬을까? 나의 마음에 감복해서 "내가 너를 좋아해볼게"라고 이야기를 했을까? 그렇지 않다. 서로의 호감을 확신했을 때, 관계를 정립하기 위한 고백(흔히 이런행위를 고백이라고 말하진 않는다)이 아닌 이상 대부분 실패한다. 


연애는 타인이 나를 마음에 들어해야만 가능하다. 즉, '나의 괜찮음'에 타인이 끌리게 하는 것이 연애의 기초공사다. 당연히 매력을 어필하고 교감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 면에서 썸의 과정 없이 "내가 이렇게 너 좋아하니까 만나줘"라는 고백에선 심각한 수준의 '자기중심적 태도'밖에 안 느껴진다. 거절당하는 게 당연하다.



두 번째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상황에 따라 고백을 받는 이가 '정신적 폭력'을 경험하게 된다는 점이다. 지난 11일 올라온 <주간경향>의 '왜 알바에게 고백해서 혼내주려 하나요 ㅠㅠ' 라는 기사는 손님들의 고백이 얼마나 알바들을 난감하고 두렵게 만드는지에 대해서 썼다.


기사에 나온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매니저에 따르면 "가장 심한 '진상'은 고백하는 손님이며, 심지어 한번 고백한 손님이 계속 와서 부담을 주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또 6개월동안 '한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고백을 받았다는 커피전문점 알바는 '기러기 아빠'의 고백을 받거나, 고백한답시고 시를 써온뒤 계산대 앞에서 읊던 사람에게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심지어 그는 또래에게 고백받은 적은 한 번뿐이었다고 전했다. 나머지는 다 아저씨라는 것이다. 


손님이 알바에게 고백하는 것, 알바 입장에서는 곤혹스럽고 일할 의욕을 떨어트리는 일이다. 다시 찾아온다고 막을 방법도 없고, 매몰차게 거절하기도 여러모로 부담스럽다. 본사에 클레임을 거는것 혹은 스토킹이 걱정되기 때문이다. 본인은 고백이겠지만, 고백받는 사람에게는 또 하나의 '갑질 폭력'이다.


사실 이런식의 무모한 고백은 손님과 점원과의 관계에서만 이뤄지는 게 아니다. 선생과 학생, 상사와 부하직원, 정규직과 계약직(인턴) 등등 평등하기 힘든 관계에서 지위가 더 높은 쪽이 고백할 경우, 고백받는 사람은 그걸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가 없다.엄청난 압박이며 경우에 따라서는 '강요'로 여겨진다.


흔히 고백은 '용기'와 '솔직함'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권장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분위기는 주로 고백을 하는 남성들을 기준으로, 지극히 남성중심적인 시각에서 만들어졌을 것이다. 실상 젠더권력과 위계에 의한 권력을 동시에 갖고 있는 남성들에게 고백은 여성을 다루는 하나의 수단에 가깝다. 남성 본인의 의도가 어떻든 고백은 결과적으로 거절하기 어렵거나 까다로운 상황을 만들어 여성을 궁지로 몰아간다. 남성들이 고백을 해서 얻는 최악의 결과는 '거절'일 뿐이지만, 여성들은 날벼락같은 고백을 받고 그 고백을 거절할 경우 예상되는 불편과 불이익 등을 고민해야 한다. 얼마나 불공평한가.


갑의 위치에 있는 남성들은 '함부로 고백해도 괜찮은' 그 상황을 한껏 이용한다. 지난해 4월 인권위 주최 토론회에서 권수현 선생은 “40~50대 유부남들의 사적 만남 요구가 신입사원들의 조직 부적응을 초래하는 핵심적인 요인"(http://omn.kr/qzb6)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좋아한다', '사랑한다', '보고싶다'와 같은 말이 어떤 경우에는 세상 그 어떤 욕보다도 끔찍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이야기 한 주간경향의 기사는 이렇듯 여성을 괴롭히는 고백의 형태를 '고백해서 혼내주자'(변변치않은 내가 고백하는 것이 상대방에게 타격을 입힌다는 것)는 남초 커뮤니티에서 유행하는 자조적인 드립과 연결시킨다. 이 드립의 전제는 남성들조차 어떤 고백은 여성에게 굉장히 불쾌하고 짜증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여성을 당황하게, 심지어 고통스럽게 하는 고백들은 계속 이어질까. 여전히 '고백해서 혼내주자'가 일종의 밈(인터넷 놀이)으로만 그치고 있으며, 남성이 제멋대로 고백을 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 구조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찌질한 고백은 대중매체 등에 의해 낭만화·정당화되고, 고백했다가 차였다고 하면 주변에서 위로해주기까지 한다. 전반적으로 사회가 고백하는 사람의 입장에 이입해 그들의 '자기중심성'을 강화시켜주니, 남성들은 고백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은 돌아보지 못하게 된다. 


또한 사회적으로 고백이 '진정성 있는 행위'로 여겨지다보니, 고백을 거절한 여성을 비난하며 집착하고 범죄로 이어지는 경우도 생긴다. 진실된 마음을 전했는데, 왜 안되느냐는 억울함이 커지는 것이다. '피해자 남성'의 모델과 '쌍년 서사'를 지탱하고 있는 게 한국의 고백 문화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상대방이 예상하지 못하는 고백, '어쩌라고’ 싶게 만드는 고백은 '감정의 배설'일 뿐이다. 배설을 왜 자꾸 정당화하거나 부추기는가.


고백이 언제나 폭력은 아니지만, 때때로 폭력이 될 수 있다. 특히 위계가 있는 사이에서의 고백은 심대한 정신적 폭력을 가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백해서 혼내주자'라는 드립을 넘어, '그런 고백은 폭력입니다'라는 진지한 캠페인이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