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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훈 May 27. 2019

하나도 웃기지 않습니다

버닝썬과 미투를 '패러디 소재'로 생각하는 남자들

유튜브 채널 <김용민TV>에서 13일 처음 선보인 프로그램 '버닝선대인'은 많은 이들로부터 버닝썬 사건을 '웃음거리'로 삼는 타이틀이라는 항의를 받았다. 결국 이틀만에 제작자인 김용민씨가 "죄송합니다"라며 '주간선대인'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사건이 마무리됐다.


그런데 프로그램명만 바꿨을 뿐, 영상에는 아직도 '버닝선대인'이라는 도입부 이미지가 남아있다.  #버닝선_대인 이라는 태그도 그대로다. '경제뉴스 팩트체크' 기능을 하는 프로그램인데, 어째서 프로그램에 저런 이름이 붙었는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보아하니 선대인씨는 사전에 프로그램명을 몰랐던듯 하다. 한 사용자가 페이스북을 통해 제목에 관한 우려를 표하니 선씨는 "제작사가 붙인 타이틀인데, 그렇게 나갈 줄 몰랐다"며 "타이틀 때문에 저도 아직 시작한 사실을 소개를 못 하고 있다. 바꾸자고 했다"고 답하기도 했다. 실제로 영상에서는 프로그램명이 언급되지 않았다.


유튜브 영상에는 아직 이 이미지가 남아 있다.


결국 김용민TV측이 '버닝선대인'이라는 제목을 참신하다고 여긴것인데, 이 보더라도 김용민씨와 그 주변 사람들이 버닝썬 사건을 대단치 않게 여긴다고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약물강간이나 성구매 등으로 여성을 착취하며 유착관계를 형성하는 남성 카르텔이 이 사건의 핵심이라는 것을 모른다. 무슨 일이 있었든간에 그저 '연예인들 사건' 정도로만 생각하는 듯 하다. 


반면 많은 여성들에게 '버닝썬'은 그 자체로 분노를 자아내는 키워드다. 버닝썬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성폭력뿐만 아니라, '승리 단톡방'멤버들이 벌인 성폭행 의혹과 불법촬영 등까지 모든 범죄가 '버닝썬'이라는 키워드로 묶인다. '승리 단톡방' 사건을 처음 알렸던 강경윤 기자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단톡방 멤버들이 한 여성을 지목하면서 '그 여성이 성적으로 문란하다' 이렇게 비난하고 성희롱을 하면서 '위안부급이다'라는 표현을 쓰거든요. 저는 거기서 너무 충격을 받고 막 3일동안 잠을 못잤어요. 너무 분노가 치밀어서."


강경윤 기자 스브스뉴스 인터뷰 중


그들이 '김학의 성폭행 의혹'이나 '장자연씨 성접대 강요 사건'에 대해선 감히 '패러디'를 할 수 있었을까. 애초에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진보진영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이 가해자로 언급되는 사건들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그들은 누구보다도 저 두 사건에 대해선 공분을 표하고 있다. 그런데 왜 저 두 사건과 본질적으로 비슷한 '버닝썬 사건'으로는 '웃음'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대체 얼마나 사건을 가볍게 여기길래, 얼마나 여성들의 분노가 우습길래.


지난 3월 인기 유튜버 대도서관도 농장 시뮬레이션 게임 방송을 하던 도중 시청자가 자신 모르게 빚을 지자, "세무조사를 해야겠다"며 농장 이름을 '버닝팜'으로 지어서 논란이 됐다. 매우 부적절한 행태였지만, 당시 버닝썬이 세무조사당할 때였으므로 최소한의 연관성은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버닝선대인'은 대체 무슨 맥락인가. 앞서도 말했지만 경제 관련 기사 팩트체크랑 버닝썬 사건은 아무 맥락도 없다. 그저 장난이다. '위트'있다고 생각한 제목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미투' 역시 마찬가지다. 많은 여성들의 성폭력 피해 고발과 연대를 의미하는 이 말을 언론사들은 '빚투'라는 패러디식 신조어를 만들며 의미를 퇴색시켰다. '빚투'라는 말은 자정되지 않았고 점점 더 널리 쓰이는 말이 되어버렸다. '미투'의 의미가 무엇인지, 여성들이 어떤 마음가짐으로 미투를 외쳤는지 생각하면, 감히 제목에 '빚투'를 쓰진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고, 분노가 되는 키워드를 왜 누군가는 웃음 소재로 여기는 것일까. 82년생 김지영을 패러디한 돼지바 광고 ‘83년생 돼지바에서 사람들을 결정적으로 화나게 했던 것은 "사람들이 나보고 맘충이래"라는 문장을 "사람들이 나보고 관종이래"로 바꿔서 표지에 적은 것이다. 만든 사람이나 승인해준  사람이나 '재미있고, '신선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 광고가 나가기 전까지 그 누구도 '맘충'이 어떤 맥락을 가진 단어인지 파악을 못한 것은 아닐까.


혐오 단어, 혹은 피해자가 존재하는 사건 명칭을 '패러디 거리'나 '웃음 요소'로 여기는 사람들에 대해서 단 한가지는 확신할 수 있다. 그들은 약자·소수자의 삶에 관심이 없다. 공감할 줄도 모른다. 자신이 그런 수준의 사람임을 들키기 싫어서 남에게 계속 "네가 예민하다"고 말할 뿐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나는 예민한 사람으로 살고 싶다. 그래야 타인이 고통을 호소하고 분노하는데 저 혼자 웃는 사람은 안 될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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