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정훈 Mar 09. 2020

대통령님, '여성의 날'에도 남성에게 감사해야 합니까?

단 하루만이라도, 여성에게만 '존중'과 '공감'을

"여성들뿐만 아니라 남성들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SNS에 올린 '세계 여성의 날' 축하의 글 말미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여성의 용기에 박수를 보내고, 평등한 세상을 바라는 앞의 내용에 찬물을 끼얹는 문장이었다. 


갑자기 왜 남성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지 맥락도 불분명하다. '우리 국민 화이팅' 같은 말이 여기서 왜 튀어나올까. 혹자는 '여성만 챙기는 정부'라는 말이 나올까봐 그랬을 거라며, 청와대를 이해하고 두둔한다. 그런데 그들 말대로 이렇게 짧고 평이한 여성의 날 축사조차 대통령과 청와대가 '안티 페미'들의 눈치를 봤다면, 더 황당하고 부끄러운 일이다.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해서도 안 되는 문장이다. 온건하거나 타협적인 메시지도 아니다. '남성에게 감사한다'는 것은 여성의 날의 의미 자체를 망각한 것이다. 많은 페미니스트들은 여성의 날이 왜 있냐는 물음에, '남성의 날은 364일이니까'라고 답하곤 한다. 여성의 날은 단 하루, 차별과 폭력 속에서 버티고 저항해왔던 여성들을 응원하며, 여성노동자의 현실을 되돌아보는 날이다. 그 하루조차 여성들에게 온전한 감사를 표하지 못해서 '남성들에게도 감사한다'고 해야 하는가?


올해는 코로나19로 인해 취소됐지만, 몇 년전부터 여성단체들은 여성의 날마다  '3시 STOP 여성파업' 행사를 열었다. 임금격차가 100대 64이므로, 남성과 비교했을때 여성들이 사실상 오후 3시부터는 무급으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반한 것이다. 심지어 남성정규직과 여성 비정규직의 임금격차는 100대 37.5에 육박한다. 경력단절이나 노동시장 차별로 인해 여성 노동자중 비정규직은 50.7%로 정규직보다 더 많다. 반면 남성 노동자는 정규직이 66.8%나 된다 (2018년 8월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 인용). 


임금격차만이 문제가 아니다. 알다시피 채용차별, 유리천장, 직장 내 성폭력 등등 여성노동자를 억압하고 일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소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1908년 미국 뉴욕의 러트거스 광장에 모인 섬유 노동자들이 "빵과 장미를 달라"고 했던 그 시절의 문제는 표면적으로는 해결됐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해결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여성들은 끊임없이 '동일임금 동일노동', '미투' 등을 외치며 거리로 뛰어 나올수밖에 없었다.


실제 여성 노동자들은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직장 내에서 차별을 경험하게 된다. 그중 사회적으로 논란이 됐던 사례를 간략히 이야기해보겠다.


1. KEC의 노골적인 성차별: 인권위 조사 결과 반도체 기업인 KEC의 생산직 노동자 353명중 여성 151명은 모두 사원등급인 J등급에 속해있었다. 반면 남성은 202명 가운데 182명이 관리자급인 S등급이었다. 동일한 일을 해도 남성만이 승진이 됐다. 


심지어 채용시점부터 여성은 J1이었는데, 남성은 그 윗단계인 J2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등급이 올라감에 따라 기본급도 올라가고, 이는 수당에도 영향을 미치니 시간이 지날수록 임금격차가 커질수밖에 없다.


2. 여성은 정규직 전환 배제한 기아차: 기아자동차는 '불법파견' 문제가 제기되며, 2013년부터 비정규직 사내하청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특별채용' '우대채용' 형식으로전환해왔다. 그러나 2018년 6월까지 정규직 전환자 1500명 중 여성은 한 명도 없었고(불법파견 노동자 중 여성의 비율은 20% 정도다), 이에 여성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고용노동청에 근로 감독을 요청했다. 


놀라운 것은 기아차 정규직 노조의 반응이었다. "준비 없는 여성 채용은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며 지방고용노동청에 의견서를 제출한 것이다. 게다가 이들의 행태를 비판한 <한겨레>에는 "대놓고 사측을 돕는다"며 반발하기까지 했다. 이후 여성 노동자 26명이 특별채용 대상에 포함되는 등 진전이 있었지만, 남성중심의 노동환경이 여성을 어떻게 배제하는지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 르노삼성자동차 성희롱 사건: 가해자가 2012년~2013년 약 1년가량 지속적 성희롱을 해오자, 피해자는 이를 회사 측에 신고했다. 하지만 인사팀 직원은 피해자에 대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트리는 등 2차가해를 했고, 심지어 회사는 피해자의 인사고과를 낮게 부여하며 대기발령 등 인사상 불이익 조치까지 가했다. 


하지만 피해자는 회사에 민사소송을 제기하고 버텼다. 파기환송심까지 간 끝에 성희롱 가해자와 2차가해자의 책임은 물론 회사의 부당징계 불법행위까지 인정되는 판결을 얻어냈다. 그러나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14년 르노삼성을 향해 여성단체가 고발장을, 조력자가 고소장을 제출했지만, 검찰의 수사는 2018년에서야 이뤄졌다. 지난 2월에서야 1심에서 임직원 두 명과 르노삼성 측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일터에서 성폭력을 걱정해야 하며, 성폭력 피해조차도 쉽게 신고하기가 어려운 상황은 여성노동자를 이중삼중의 차별 구조로 내몰고 있다. 대부분의 이러한 현실을 알고 있으므로 여성들은 자신의 피해를 신고하기도 어려워하고, 피해를 신고하더라도 이후의 2차가해등을 견디지 못하고 퇴사하곤 한다. 


위와 같이 여성노동자들이 부당하게 겪는 차별과 폭력을 저항해 나가자는 것이 여성의 날의 취지다. 그리고 지금껏 그 현실에서 싸워왔던 이들을 향해 장미를 선물하는 것은 '위로'나 '격려'보다는 '존중'과 '공감'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한편, 남성들은 쉽게 바뀌지 않는 현실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맞다.  2018년 여성의 날, "한 여성의 아들이자 또 다른 여성의 동반자로서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기 어렵습니다"라고 말했던 고 노회찬 의원처럼.  


여성의 날마다 거리에 나온 전세계의 여성들이 규탄한 것은 가부장적 사회와 가부장적 자본이었다. 남성이 운영하며, 모든 것을 결정하는 그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런날, 대통령이 '남성에게 감사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동안 여성을 억압한 자리에 올라서서 '남성이라서' 반사이익을 누려 온 것에을 부끄러워하라고 말하는게 맞다. 그게 어렵다면 최소한 남성 정치인으로서의 성찰적 메시지는 있어야 했다. 대체 누굴 위한 축사인가?


문 대통령은 대선 당시 '페미니스트 대통령'이라는 구호를 내세우지 않았나. 제발 여성의 날에는 여성에게만 감사해달라. 단 하루만이라도. 대통령과 청와대가 눈치보지 않고 여성 인권을 개선하겠다는 강하고 명확한 메시지를 내어야, 행정부처가 움직이고 여성혐오세력이 움츠러든다는 걸 명심하시길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성의 날] '거부할 수 없는 요청'을 마주한 남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