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0일 국회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에 올라온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에 10만명이 참여해 청원이 성립됐다. 이어서 국회는 3월 5일 국회 청원 1호 법안인 'N번방 방지법'(성폭력처벌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많은 언론은 위와 같이 보도했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5일 통과된 법안에는 딥페이크 영상의 제작 유통만의 처벌 규정이 있을 뿐이었다. 정작 국회 청원은 본회의에 올라가지도 않고 폐기되었고, '청원 취지가 반영됐다'며 기존의 성폭력 특례법 개정 발의안 4개와 병합되어 처리되었다.
청원인이 요구한 내용은 (1) 경찰의 국제공조수사 (2) 수사기관의 디지털성범죄 전담부서 신설 및 2차 가해 방지를 포함한 대응매뉴얼 신설 (3)엄격한 양형기준을 설정 등이었다. 그러나 '1호 법안'에는 그 어떤 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N번방 성착취 강력촉구 처벌' 첫 시위 장소가 국회로 정해진 이유다 (코로나로 인해 연기됐다).
이러한 졸속 처리에는 남성 고위 공직자 및 국회의원들의 무관심과 경솔함이 한 몫 했다. <경향신문>이 보도를 통해 이 문제를 지적해, 청원 취지를 논의한 법사위 회의록을 확인해봤다. 이때 N번방 이야기는 딱 한 번 나온다. 아예 무시하고 넘어간 수준이다.
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 "이것(딥페이크)도 소위 ‘n번방 사건’이라는, 저도 잘은 모르는데요."
백혜련 의원: "그런데 n번방 사건은 이것하고는 좀 다른 형태 아니에요?"
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 "다른 형태인데 하여튼 맥락은..."
심지어 이 자리에선 딥페이크에 대해서도 "자기 만족을 위해 이런 영상을 가지고 나 혼자 즐기는 것까지 갈(처벌할) 것이냐”(정점식 의원) ",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서 그런 짓 자주 한다”(김오수 법무부 차관)는 식의 말이 나왔다. 반포할 목적이 없는 영상까지 처벌할 수 없다면서, 텔레그램에서 어떤 식으로 영상이 의뢰되고 퍼지는지는 인지하지 못하고 과잉입법만을 우려한 것이다.
지난 11월 <한겨레> 보도 이후 수많은 언론들이 보도해왔고, 그동안 여성들은 직접 잠입 취재를 하고, 피해자 지원 단체도 만들었다. 청와대 청원과 국회 청원도 성립시켰다. 그렇게까지 했는데 고작 나오는 반응이 '잘은 모르는데요'였다. 대부분 남성 주체들이 지배하고 운영하는 정부와 국회가 얼마나 여성 문제를 등한시해왔는지 보여주는 일이 아닐까.
비단 정부와 국회뿐만이 아니다. 기성세대 남성들의 성폭력에 대한 태도는 '내 일'이 아니라서, '내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무관심에 가깝다. 이들은 직관적으로 파악이 쉬운, 명백하고 극심한 피해일 때만 분노를 하며 관심을 갖는 척 한다. 하지만 다양한 형태로, 매우 복잡한 상황과 관계 속에서 이뤄지는 성폭력에는 침묵하고 방조한다. 폭력의 실체가 무엇인지 파악하려들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렇게 노력하지 않아도 되는, 젠더권력을 가진 '남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많은 직장이나 단체에서 여성들이 지속적으로 성폭력 피해를 입었고, 반면 가해자들은 약한 처벌을 받고 빠져나가는 일이 반복되어왔다. 그렇게 남성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성폭력은 '할 수 있는', '해도 괜찮은' 행위가 되어갔다. 심지어 자신과 주변 남성들의 행동이 성폭력인지도 모르는 채로, 성폭력을 일상화한 이들도 있다. 많은 남성들은 성폭력이 대단한 악행인줄 알고 있을뿐, 실제로는 평범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성폭력 발생 구조를 더욱 공고하게 유지시키는 가해자거나 공범임을 망각하고 산다.
텔레그램에서 성착취를 즐기던 이들은 갑자기 등장한 존재들이 아니다. 여성을 성적대상화 시키는 분위기 속에서 성폭력을 저지르고 그것을 은폐했던 남성들, 성구매를 비롯해 성착취 행위를 매개로 우정을 쌓아온 남성들, 온라인에서는 소라넷 등의 사이트와 웹하드에서 불법촬영 영상을 보고 낄낄거리던 남성들... N번방 가입자들은 그들의 후예다. 10~20대 '평범한 악마'들은 이전 세대가 만들어놓은 인식적 기반을 활용했다. 여성의 성을 사고 팔수 있다고 믿고, 여성의 고통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든 토대는 전부 기존의 강간문화에서 왔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표면적으로는 N번방 주동자 및 가입자들의 엄중 처벌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청원 참여를 요청한다거나 (일부 사이트에선 이것을 비웃기도 한다), 성찰적인 모습을 보는 것은 드물다. 심지어 여성들로부터 '잠재적 가해자'론이 나올까 걱정하기도 한다. 그런 글을 보고 있으면 그들이 피해자의 고통에는 아무래도 관심이 없는듯이 느껴진다. 실제로 잘 모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내가 N번방 들어간 건 아니잖아'가 유일한 알리바이인 사람들이다. 사실 그들이 '가해자'로서 죄의식을 느끼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사안의 심각함에 공감하고 N번방 사건에 대한 지지와 관심을 이야기하기를 바랐다. 그게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이니까.
그런데 한 남초 커뮤니티를 둘러보니 이번 사건이 주목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분위기마저 느껴진다. 20일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이수정 교수 인터뷰를 공유하면서 '페미 광풍이 무서워 법개정을 하면 안된다'거나 , N번방 가입자 추정치인 26만명을 두고 '근거가 없다'는 등의 말을 한다. 앞서 말했지만 이들은 결코 폭력의 실체를 파악하려하지 않고, 지엽적이거나 부차적인 사안에 대해서만 떠들어댄다. 그래도 '괜찮기' 때문이다. 여성들은 하나도 괜찮지 않다.
여성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하고 피해를 호소하지 못하게 만들어, 욕망을 채우고 돈을 버는 남성. 이런 일은 N번방에서만 일어났던 것이 아니다. 남성들이 발전시켜 온 성착취 구조가 변형해서 등장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N번방 성착취는 N번방에 들어간 이들만의 문제만이 될 수 없다. 남성들은 N번방 가입자들을 비난함으로써 면죄부를 받으려 해도, 혹은 'Not All Men'이라는 말로 비난을 피해가려고 해도 안 된다. N번방은 남성들이 만든 '지옥'이다. 그 사실에 참담함을 느끼면서 자신을 되돌아 봐야 한다. 지금껏 성착취를 용인한 남성 문화를 뒤집어버리지 못하면, 플랫폼만 바뀐 채 N번방 성착취와 유사한 사건이 또 일어날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발 여성들 옆에서 함께 싸워주시라. 특히 남성화된 정치 시스템이 좌절시킨 'N번방 특별법'의 제정이 절실한 상황이다. 이번에 체포된 '박사'의 형량에 대해 '무기징역'도 가능하다는 의견도 있는 반면, 강력한 처벌은 어럽다는 비관론도 존재한다. 그만큼 그의 범죄를 처벌할 수 있는 명확한 법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아동 성착취 영상 사이트 운영자 손정우가 고작 징역 1년 6개월을 받았을 정도로, 지금껏 사법부의 디지털 성폭력 처벌은 솜방망이였다. N번방 운영자 및 가입자의 경우도 죗값을 제대로 치를 수 있을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그래서 디지털 성범죄를 '포괄적'으로 강력하게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 제정이야말로 이번 총선에서 꼭 쟁점이 되어야 한다. 남성 유권자, 남성 당원, 남성 후보자라고 해서 이 문제를 외면하지 않았으면 한다.
침묵은 강자의 권리일뿐이다. 남성들은 안락한 위치에 머물지 않고, 평가하지 않고 경청하며, 자신의 허물을 깨닫고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이 거대한 지옥을 없애기 위해선, 염치와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부터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