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부터 뉴질랜드를 거쳐 여기 호주까지 사회생활을 해오면서 나의 능력 여하를 불문하고 내가 하는 만큼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한 일들에 대한 인정은 고사하고 이런저런 일들에 묻혀 지나가는 것이 다반사고, 해 놓은 것은 티도 안 나고 안 했을 때만 티가 나는 경우가 태반이니까.
특히나 외국에서의 생활은 가만히 있다가는 ‘가마니’로 전락되기가 쉽기 때문에 묵묵히 일하는 나를 알아 봐 주기를 바라고만 있는 것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되는’ 포지션을 전세 내는 일과도 같다는 생각을 한다.
외국 생활 초반에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yes girl’로 활동할 당시, 여기저기 이용도 종종 당하고 상처도 받으면서 더 이상은 가마니에서 머물 수 없어 나도 나를 드러내기 위한 뭔가를 해야 했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시작한 것이 내가 한 일들에 대한 피드백을 ‘굳이’ 받는 것이었다.
뉴질랜드에서 일하던 호텔에서 마케팅 팀 직원이 우연히 내 손글씨를 본 후, 나에게 프로모션 광고 문구를 만드는 일을 시켰었는데 엘리베이터나 레스토랑 입구에 세워진 내가 만든 광고판을 친한 매니저들이 지나갈 때면 ‘굳이’ 불러다가 보여주면서 ‘나 이런 식으로도 쓸모 있어’라는 식의 표정을 지으며 내가 한 작품이라는 것을 상기시켰다. 솔직히 내가 미술 전공자도 아니고 학창 시절 미술시간 = 노는 시간 이었던 입장에서 수려하고 전문적이게 보이지 않는다는 걸 나도 잘 알기 때문에 대단한 칭찬을 기대하고 말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곳에 미술 전공자나 더 잘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그 사람을 시켰겠지.) 나의 목적은 소리 없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는 100여 명의 직원 중에 하나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말 한마디 더 하고 얼굴 한 번 더 비추면서 나의 존재를 알리고 싶었다.
그리고 손님들이 칭찬 코멘트 카드를 남기면 보통 HR에서 이메일이 오는데 그럼 나는 또 ‘굳이’ 그걸 매니저한테 가서 나에 대한 칭찬 멘트들의 열람을 확인하였다. 그럼 매니저들은 대체로 웃으면서 잘했다고 했는데 사실 내가 코멘트 카드를 타 직원들에 비해 월등히 많이 받는 건 또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는 몇 안 되는 나의 ‘잘함의 증거’를 각인시켜주는 게 필요했다고 느꼈던 것이다.
너는 어떻게 새벽 5시에도 그렇게 행복할 수 있니? 에서 언급한 것처럼, 나의 행동의 기반은 평소에 매니저들 사무실을 지나가다 별 용건 없이 들어가 앉아 있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적당한 밝음과 똘끼를 부려놨기 때문에 가능한 일 일수도 있겠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맡은 일에 대해서는 열심히 잘하고 책임 있는 모습 역시 이미 보여놨기 때문에 매니저들이나 다른 직원들이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여 주었던 것 같다. 일례로 한 날, 레스토랑 뒤편에서 혼자 일을 하고 있는 나를 매니저가 찾아왔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너 어디 있냐고 물어봤더니 다들 걔는 안 보여도 어디선가 늘 일하고 있다고 하던데 정말이네.”
라고 말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앞서 언급했던 바와 같이 내가 한 만큼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은 일이다. 다시 말해서, 나의 노력을 인정을 해줄 수 있는 상사,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내 영역 밖의 일인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가 외국 생활을 이만큼 버티게 해 준 것은 내가 한 만큼 보다도 더 예뻐해 주는, '인복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교 과목 중 호텔 인턴쉽이 필요한 수업에서 다른 학생들은 다 무보수로 시간 채울 때 나는 일하던 호텔 매니저의 배려로 유급으로 인턴쉽에 필요한 시간들 채울 수 있었고, 메뉴 디자인 수업 때는 전에 같이 일하던 쉐프가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어서 수월하게 끝낼 수 있었고, 코로나로 다들 강제 휴직을 종용당할 때 가장 먼저 나에게 일자리를 제안해 주시기도 했고 (당시 직속 매니저는 외국 학생 신분이었던 나의 상황 걱정해서 식료품이라도 사주겠다고 사적으로 연락도 해주심), 영주권 때문에 부서이동을 해야 할 때에도 일했던 호텔, 일하고 있던 호텔에서 원하는 시기에 옮길 수 있게 오퍼를 해 주셔서 내 상황에 유리한 방향으로 선택할 수 있었고, 사실상 지금도 영주권 준비 과정에서 executive chef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는 중이다. 또 나를 길 잃은 어린 양 처럼 어여삐 여겨주시며 챙겨주시던 퀸스타운 언니님들, 예전에 일자리 못 구해서 빌빌 거릴 때 방값을 일 구하고 주급 받는 날 몰아서 내라고 인심 써주신 집주인 이칭 아주머니도 계셨고, 지역 이동할 때 이사할 집 구할 동안 머무르라고 흔쾌히 방을 내어주신 준코 아주머니, 언제나 나에게 호주 엄마, 아빠라고 말해주시며 10년 넘게 가족이라 여기며 지내는 샌디 아주머니, 놀 아저씨도 계신다.
가만히 있어도 미운 애, 하는 것 없이 예쁜 애가 분명히 존재하는 이 시공간에서, 내 노력 여하 따위와는 상관없이 내가 누군가에게 어디에 속하게 될지 모르는 복불복과도 같은 인간관계에서 내가 열심히 하는 만큼, 잘 보이려고 하는 만큼 잘 봐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큰 행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