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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앤지 Oct 19. 2023

해외생활 11년이 만든 습관, 취미… 그리고 나

도서관 가기.

운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는 해외생활에서도 집을 구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건 한국에서와 같이 역세권이지만 어찌어찌 구한 집 근처에 도서관이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면 나는 남다른 안도감과 설렘을 느낀다. 이렇게 도서관을 좋아하고 제 집 드나들 듯이 가게 된 것은 십 년도 더 넘어 워킹 홀리데이시절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어학원 다닐  당시에 함께 수업을 듣는 친구들이 대부분 수업 마치고 노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없는 워킹홀리데이들이었기 때문에 수업이 끝나고 뭐 할지를 정하는 것이 하루의 중요한 일과 중에 하나였다.

어학원의 수업은 일반 학교 수업과 다른 게 널널한 편이어서 수업시간 틈틈이, 쉬는 시간 대놓고 방과 후 일정을 계획하곤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결론이 지어지지 않는 불안정한 날이 있기도 했다.


그런 우리들이 수업이 끝나고 정리되는 학원을 나와 ‘일단’ 가고 보는 곳은 도서관.


한 때 나의 만남의 광장이었던 도서관


시원한 도서관에 앉아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 보면 그냥 거기에 눌러앉아 숙제를 하기도 하고 또 지나가던 친구들을 우연히 만나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운명처럼 생겨 새로운 하루를 만들기도 했다.

그때는 집집마다 무제한 인터넷이 깔려있는 곳이 드물었고 나는 개인 노트북도 없었기 때문에 주말에도 책이든 공부할 거리든 챙겨서 도서관에 가곤 했었다.

그렇게 간 도서관에는 약속하지 않아도 비슷한 마음으로 친구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해 같이 공부하기도 하고 (솔직히 그보다) 같이 머리 맛대어 놀 거리를 찾아 떠나곤 했다.

그 시절 도서관은 나에게 만남의 광장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책을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대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 도서관에서 폐점 안내방송을 듣고 나오는 것이 일상이 되다 보니 그 시절 도서관은 나에게 집이었다.


그렇게 도서관이 필요했던 시간이 지나 집에서도 인터넷을 제한 없이 쓸 수 있고 나름 신식 노트북도 있고 일주일에 두 번은 하루종일 뒹굴거릴 수 있는 시간도 주어졌지만 딱히 갈 일이 없음에도 나는 나의 신식 노트북을 챙기고 이것저것 챙겨서 도서관으로 향한다.


내 짐을 다 두고 가는 화장실 사용은 다소  불안한 감이 없진 않지만 일단 사람들이 많지 않기도 하거니와 Quite zone을 제외하고는 약간의 소음은 그냥 넘어가주고 간단한 스낵정도까지는 허용해 주는 도서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편하기도 하고 뭔가 낯설었던 이 사회에 적응해가고 있다는 안도감을 준다.  


밖은 나가고 싶은데 딱히 만날 친구도 갈 곳도 없는 나에게 목적지가 되어주는 지금의 도서관은 나에게 휴식이다.



세일 카탈로그 챙겨보기.


해외 생활 초창기에 ‘거지 같은’ 생활이 아니라 말 그대로 ‘거지’ 였을 때,  

김치가 너무 먹고 싶어서 마트에서 들었다 놨다 하다가 결국 사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기를 수십 번 반복하고 세일할 때 겨우 산 김치로 김치볶음밥을 만들었는데 김치가 아까워서 하도 잘게 자르는 바람에 이게 밥알인지 김치인지 알 수 없게 해 먹으며 살았을 때,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매주 월요일 5시. 그 주 수요일부터 담주 화요일까지 진행되는 세일 품목 카탈로그가 업로드된다. 예전에는 마트에서 나오는 세일 브로셔를 가져왔었고 요즘은 세일 카탈로그를 챙겨보며 쇼핑 리스트를 짜는 것이 내 일주일의 주요 업무 중의 하나이다.


그리고 요즘은 세상이 많이 좋아져서 한인 마트도 많이 생겼고 매장이 많은 한 체인점은 매주 금요일부터, 집 근처에 있는 한 곳은 화요일부터 새로운 상품들의 세일 기간이 시작되어서 아주 계획적인 소비를 하지 않으면 통장에 구멍 날 수 있으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한다.


아무리 먹고 싶어도 세일을 하지 않으면 내 쇼핑 리스트에 초성도 못 담았던 시기들이 있었는데 언젠가 (아마도 그나마 좀 먹고살 만해졌을 때였겠지?) 여자들만 안다는 견딜 수 없이 ‘단 게 당기는 그날’ 너무 먹고 싶었던 나머지 정신 잃고 4불짜리 크림빵을 겁 없이 사 먹고 난 뒤에 세상이 생각보다 크게 바뀌지 않는다는 걸 깨닫고는 종종 세일 품목에 없는 물건들도 눈독 들이는 바람에 카탈로그 세상이 아니라 그냥 놀이터 가듯이 마트를  ‘가보는 것’에도 취미를 들이고 있어서 점점 나도 내가 불안해지는 요즘이다.



맛없는 것도 그냥 먹기.


우리 어머니께는 참 죄송한 일이지만 여느 음식점보다도 맛있게 만드시는 어머니를 두고도(장염 걸린 딸에게 피자를 사주는 엄마 편 참고) 나는 편식을 하는 편이었다. 일단 물고기를 잘 안 먹고 태어나서 추어탕, 감자탕도 한 번도 안 먹어 봤고… 기본적으로 아는 맛에 대한 열망이 커서 그런가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별로 없는 편이라고 할까?


그런 내가 눈치만 조금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따듯한 방과 푸짐한 식사가 보장되는 한국과 달리 돈을 내지 않으면 당장 길거리로 나앉게 되는 외국 생활을 하게 되니 절약을 위해 많은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8명이 한방에 지내기도 하고 남녀가 섞인 14명이 한 개의 화장실을 쓰기도 하고 왕복 네 시간을 걸어 다니며 일을 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 아니면 그 누구도 챙겨주지 않는 생활이 되니 끼니를 챙기는 습관을 들이는 게 가장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걸어 일을 다녀오면 몸은 피곤하고 씹는 것조차 의욕이 없어 지쳐 잠들다 빈속에 쓰러지기를 몇 번...


지인의 집에 초대를 받거나 일하는 곳에서 점심을 제공하면 내가 좋아하지 않는 메뉴가 나와도, 듣도 보도 못한 음식이 나와도 일단 먹게 되었다.  

그렇게 먹게 된 여전히 좋아하지 않고 이제는 먹지 않는 사슴 요리캥거루 요리.

그렇게 먹게 된 여전히 좋아하지는 않지만 있으면 먹기는 하는 인도커리 비프파이(beef pie).


21세기에 영양실조가 웬 말이냐며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이러냐며 하루 한 끼라도 뭐든 먹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렇게 1일 1식이 익숙해졌나 봄) 자취생 요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한국 라면은 너무 비싸서 엄두도 못 내고 제일 싼 홈브랜드 식빵과 딸기잼을 사서 먹기 시작하다 계란을 얹어 먹기도 하고 밥에 간장을 비벼 먹기도 하다가 지금은 요리로 돈을 벌 수 있는 정도까지 되었다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성장기. (^^)

지금은 직업으로 하는 요리에서는 손을 뗐지만 일상에서의 요리는 계속되고 있다.


딸들은 엄마 손맛을 따라간다고 했던가…?


다행히 요리 솜씨 좋은 엄마를 만나서 맛을 잘 내는 편이다. 나만 먹는 음식이니 나만 맛있으면 됐지 뭐.

근데 가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랑 오래 떨어져 있어서 그런가, 집에 있는 재료들이 달라서 그런가, 실험적인 음식들을 내 손으로 만들고 나에게도 맛이 ‘잉?’ 하고 의문스러울 때가 있다.

뭐 이런저런 소생술을 시켜보지만 결국 살리지 못하더라도...

일단 먹어, 그냥 욱여넣어, 그리고 씹어,그리고 삼켜, 그래야 한다. 그렇게 되더라고…



그렇게 복불복이거나 깊이 없는 음식들만 먹다가 어머니 손맛이 그리워서 내년 휴가계획을 짰다.


한끼에 하루를 불 태우는 해외 자취생의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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