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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tacura Apr 22. 2022

프리랜서 번역가

(일단은) 활동하는 프리랜서 번역가

혹시... 무슨 일 하시나요? 


조심스럽게 예의를 차린 듯 하지만 호기심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아이들 유치원 버스를 기다리며 몇 번 본 같은 반 친구 엄마였다.  


사실 이전 직업도 한 마디로 '전 OO입니다.'라고 말하기는 어려워 '그냥 회사 다닙니다'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회사가 있고, 그 회사 안에서도 얼마나 직종이 있는데, 그걸 '그냥 회사 다닙니다' 한 마디로 퉁을 칠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것도 꼭 앞에 '그냥'을 넣어야 자연스러운 느낌이 나는 건 왜 그런 건지. 그렇다고 밑도 끝도 없이 '해외영업합니다'라고 하기도 이상했다. 


이번 직업도 사정이 비슷하다. 생각 같아선 '그냥 프리랜서합니다' 하는 게 가장 자연스러울 것 같지만, 뭔가 자기 비하의 느낌이 묻어 나는 것 같기도 하다('그냥 회사원'은 그렇지 않은데, '그냥 프리랜서'만 자기 비하의 느낌이 든다는 건 '프리랜서'인 나 조차도 어딘가 불안정하고 불완전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겠지). 그렇다고 뜬금없이 '번역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게 낯간지럽다. 고상하고 그럴 듯한 번역을 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자격 지심 때문이기도 하고, '난 높은 수준의 지적 노동을 하고 있다'는 같잖은 잘난 척처럼 비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기도 해서이다.  


아무튼 나는 프리랜서 번역가이다. 알바나 겸업이 아닌 전업 프리랜서 번역가가 된 지 이제 넉 달이 되어 간다. 졸업 고사를 치르고 한 달 간은 긴장을 풀면서 천천히 일자리 검색을 하고 이력서를 쓰며 보냈고, 그 다음 달은 학교에서 받은 영상 알바를 하며 돈을 벌었고, 나머지 두 달은 간간히 들어오는 샘플 번역을 하며 놀았다.  그렇게 2월과 3월의 수입은 유료 샘플 번역으로 번 몇 만원이 전부였다. 


시간이 갈수록 불안해졌다. 통번역대를 졸업하면 무슨 (작은)일이든 시작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샘플 테스트에 통과하고, 여러 번역 회사와 계약을 맺었지만, 일이 바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었다. '도대체 몇 군데와 계약을 해야 안정적으로 일을 받을 수 있는 거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일에 떠밀려 다니거나, 아님 지난 두 달처럼 한량 같은 생활을 하며 그래도 백수는 아니다 스스로 위로하며 시간을 보내는 그런 직업. 그게 프리랜서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대학원 등록금으로 그 많은 돈을 쓰고, 그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이고, 결국은 학위 하나 더 받은 백수가 되었다는 자괴감에 일이 없었던 지난 두 달은 괴로웠다. 이력서를 얼마나 더 써야 하는지, 에이전시와는 얼마나 더 계약을 맺어야 하는지 막막했다. 


그리고 맞은 네 번째 달 4월도 한가하게 시작되었다. 일이 없을 때 집안일도 좀 더 하고, 애들도 좀 더 챙겨야겠다고 생각만 할 뿐 이 마음 불편한 백수 생활을 얼마나 해야 할지, 그냥 이렇게 팔자 좋게 대학원 공부나 하고 집에서 노는 한심한 아줌마가 되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그런데 작업의 물꼬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먼저 터졌다. 워낙 큰 회사이고, 미국에 있는 업체라 별 기대 없이 지원했던 곳에서 바로 계약을 맺자고 연락이 왔고, 작업도 바로 개시되었다. 작업도 중국어 번역을 넘어서 중한번역가 실력 검증을 위한 테스트 키트를 개발하는 일이라 재미도 있고, 단가도 나쁘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중한을 포함해서 여러 언어쌍에 대한 테스트 시스템을 구축하는 중이라 앞으로 일도 꾸준히 있을 것 같아 기대가 된다. 


그리고 계약을 맺은 첫 해외 업체였던 중국의 번역 에이전시에서 전화 통역을 제안해왔다. 시간당 U$30 정도라는데, (당연히) 번역 보다 시간당 단가가 높고, 통역 경험도 쌓고 싶어서 하겠다고 했다. 테스트가 어떻게 진행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해외영업을 하면서 비지니스 현장에서 중국어와 영어를 사용했었다는 점이 평가가 된 듯 하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오늘 한국 에이전시에서도 한 달 반 기한으로 하는 게임 번역을 제의해왔다. 산업 번역을 의뢰 받아 하면서 신뢰를 쌓아 온 업체라 내게 매우 긍정적인 뉘앙스로 작업을 제안해 주었다. 지난 주에 샘플 번역까지는 통과한 다른 게임 번역과 일정이 얼마나 겹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게도 손에 잡히는 일들이 들어오고 있다. 


오늘은, 또 오늘은, 내게 생긴 일들에 감사하고 축하를 해 주어야겠다


나도 '(일단은) 활동하는 프리랜서 통번역가가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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