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치병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나는 난치병환자이다. 오늘은 6개월에 한 번씩 정기 검사 결과를 보는 날이다. 26살 즈음부터, 그때는 이름도 낯설어서 말해도 다들 잘 알지도 못하는 병에 걸렸지만, 지금까지 잘 버텨오고 있다. 어쩌면 내 삶이 실패투성이라던가 남들보다 내가 하찮은 거 같다던가 하는 생각의 시작이 여기서부터였는지 모르겠다.
이런 얘기를 하면 울거나 우울한 표정을 할 거 같지만, 난 그 반대다. 되려 이상하게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하듯 자신 있는 표정으로 톤도 밝게 그것도 아주 가까운 사이가 아닌 사람에게도 쉽게 이야기를 꺼낸다. 가끔 같이 식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면 "옮는 병은 없어요~"라는 필요하지 않은 농담까지 붙여가면서 말이다. 하지만, 가끔 나도 이런 내 모습이 진짜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한다. 여하튼 오늘은 그런 결과를 보는 날이다. 이러기 시작한 지 20여 년이 다 되어 가지만, 검사결과 보는 날은 전혀 익숙 해 지지 않는다. 애써 에어팟으로 데이식스에 "예뻤어"를 들으면 하고 싶지도 않은 흥얼거림도 덧붙인다.
이 병의 시작으로 20대에 진행되고 있던 나의 많은 꿈이 좌절되고 사라지고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 되어버렸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난 잘 받아들이고 있다. 덕분에 난 좋은 부인으로 너그러운 엄마로 착한 딸로 사는 법을 남들보다 좀 더 빨리 익혔다고 생각한다. 살아보니 아주 무조건 나쁘기만 한 일이라 건 없더라. 그저 악착같이 바른생활로 매일매일 건강한 루틴을 지켜가며 살아가는 내 루틴이 허투루 돌아가는 결과가 나오진 않을까 걱정하는 일종의 버릇 같은 불안함일 뿐이다. 괜찮은 척 노래 볼륨을 높이고 초초해서 나도 모르게 오른쪽 다리를 떨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멈췄다. 대기시간이 길어질수록 불안함에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기 시작한다. 해야 할 일도 서칭해야 할 것도 없다. 그냥 손을 가만히 두고 있지 못하겠어서 이다.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 내가 이런 과정들을 겪는 데 비해 교수님은 뵙는 시간은 30초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잘 관리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 관리하고 6개월에 다시 검사하자는 얘기. 가끔은 그 얘기 말고 다른 얘기는 할 얘기가 없느냐고 따져 묻는 상상을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나를 책임져 주고 주고 계산 분이니. 최대한 온순하고 착한 말투로 짧게 대답하고 나온다. 그게 전부다. 이 전부를 위해 나는 매일 밤 11시에 전에 잠이 들고 술, 담배는 근처도 가지 않으며 매일아침 일찍 일어나 내 루틴대로 운동하고 먹고 생활한다. 일종의 건. 강. 한 그 루틴을 20년째 이어가고 있다. 그나마 통하는 게 어딘가 싶어 안심을 하다가도 괜히 나만 이렇게 사는 거 같아 화가 나서 인상을 쓰며 물건을 신경질적으로 툭툭 내려놓으며 신세 한탄을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래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그럴 때면 나는 그저 내가 지금 되고 싶은 사람이 있는지를 생각해 보는 걸 좋아한다.
노트를 꺼내고 적어 내려 간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에 대해서.. 오늘 밤, 나는 표정이 다양한 사람, 언어를 4개 국어 할 수 있는 사람, 체지방인 23% 이하인 사람, 좋은 노래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 항상 향기가 나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적으로나 붓기가 없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그렇게 나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써 내려가면서 조금은 진정되고 안심한다. 그거면 된다.
내가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 보단 아직 내가 원하는 내가 있다는 것에 안도한다. 그저 시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내가 되고 싶은 나로 나아지고 있는 중이다. 비로소 갑자기 마음을 누군가 감싸주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이 설사 내가 나 자신을 스스로 안아주는 것이더라도.... 나는 그거면 되었다.
아무도 내가 매일을 얼마나 노력하고 얼마나 자주 깊은 불안함으로 오르락내리락하는지 알 수 없고, 그런 나를 응원하거나 위로해주지 않더라도 나는 내가 될 수 있는 나로 나아감으로써
오늘도 나는 누구보다 밝고 건강한 난치병 환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