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건 뒤에는 무엇이 있나-2>>
1992년 1월 17일 한겨울 새벽 3시쯤, 충북 충주의 검찰청 관사에서 충주지청 사무과장인 53살 김영오가 살해됐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신고자는 김영오의 딸 김보은. 당시 사건 발생 직후 신문기사는 사건을 이렇게 설명한다.
“김영오 씨 집에 복면을 한 20대 청년 3명이 들어와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김 씨와 김 씨의 딸을 흉기로 위협, 딸을 옆방으로 끌고 가 수건으로 입에 재갈을 물리고 손과 발을 묶어놓은 뒤 김 씨에게 '돈을 달라'라고 요구, 반항하자 김 씨를 찔러 숨지게 한 뒤 달아났다. 경찰은 김 씨가 수원에서 충주로 전보돼 혼자 생활한 점으로 미뤄 단순 강도로 보고 수사를 하고 있다”
경찰은 유일한 목격자이자 신고자인 김보은의 말에 따라 3인조 강도 살인으로 보고 수사를 시작했지만 김보은의 진술은 사실이 아니었다. 김영오를 살해한 사람은 다름 아닌 김보은과 그녀의 남자 친구 김진관이란 사실이 곧 드러났고 더 충격적이고 참혹한 진실도 드러난다.
김영오는 김보은의 의붓아버지다. 김보은이 7살 때 김보은 어머니가 김영오와 재혼하면서 부녀관계가 된 것이다. 그러나 김보은이 9살 때부터 김영오는 김보은을 성폭행하기 시작했다. 21살 때까지 12년간 김영오는 의붓딸을 지속적으로 강간해왔고 김보은이 대학에 들어간 뒤 천안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자 반드시 주말에는 자기가 거주하는 충주에 내려오게 해 잔인한 짓을 이어갔다.
김영오는 충주지청 사무과장으로 능력을 인정받는 검찰 수사관이자, 집에서는 폭력과 강간의 야만을 살아왔다. 이른바 끗발 좋은 가장의 사회적 지위와 배경은, 가정 내 폭력과 만행의 방패막이가 되는 시대... 더구나 가정 내 성폭행은 물론 가정 내 폭력에 대한 인식 자체가 거의 없던 시절이었다.
김영오는 자신이 수사하면서 압수한 포르노 테이프를 집에 가져와 아내와 딸에게 보여주며 변태적 행위를 요구하기도 하고, 아내와 딸을 번갈아 성폭행하기도 했다. 정상이라면 이런 사람과 같이 살 수는 없을 것이고, 어머니는 김영오에게 이혼을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그때마다 김영오는 식칼 쥐약 등을 보여주며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김보은과 그의 어머니에게 김영오의 위협은 그냥 위협이 아니라 언제든 벌어질 현실이었다. 김보은은 어린 시절 어머니가 가정 폭력을 신고해 경찰이 출동했지만 검찰청 과장인 김영오를 보고선 인사만 하고 돌아간 경험을 갖고 있다. 모녀에게 김영오와 이 세상은 한통속인 거대한 감옥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학에 들어간 김보은에게 작은 탈출구가 생겼다. 천안의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면서 주중에는 김영오를 안 볼 수 있었고 무엇보다 남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김진관이라는 같은 대학 동갑 나기. 그러나 사랑이 깊어질수록 무지막지한 괴물에 갇힌 김보은은 이 사랑을 이어갈 자신이 없어졌고 김진관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았다. 그 고백을 들은 김진관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김진관은 나중에 법정에서 이렇게 말한다.
“어머니 다음으로 사랑하는 보은이가 다른 남자에게 무참하게 짓밟히는 것을 알고도 나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죽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김영오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얘기하고 더 이상 괴롭히지 말아 달라고 애원했지만 그런 상식적인 호소가 통할 사람은 애당초 아니었다. 돌아온 것은 가만 안 두겠다는 위협과 협박뿐... 어떤 법에 어떻게 호소해야 하는지 아니 그런 법이 있기나 한 지 두 젊은이는 물론 우리 사회의 그 누구도 몰랐다.
최후의 담판을 계획한다. 김진관은 서울의 한 시장에서 식칼과 공업용 테이프와 장갑을 산 뒤 충주로 내려갔다. 17일 새벽 1시 반 김보은은 약속대로 문을 열어주고 김진관은 김영오의 집안으로, 사랑하는 애인이 갇혀 있는 야수의 소굴로 조용히 들어갔다.
김영오는 술에 취해 잠들어 있었다. 마지막 호소를 이 괴물이 들어줄 것인가,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제발이라는 마음으로 두 사람은 김영오에게 다가갔다. 김진관은 식칼을 꺼내 들었고 두 사람은 김영오의 양팔을 꽉 눌러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깨어난 김영오에게 김진관은 말한다. 보은이를 괴롭히지 말고 제발 놓아달라고...
그러나 김영오는 다 잡아넣을 것이다, 가만 안 두겠다고 오히려 소리를 질렀다. 김진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분노와 김보은이 그동안 당했을 고통에 한꺼번에 휩싸이며 손에 쥐고 있던 식칼을 내리꽂았다. 김진관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김영오를 죽인 것이 아니라 단지 내가 사랑하는 김보은을 살린 것입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김보은은 구치소에 갇힌 뒤 김영오에 갇힌 지난 12년보다 훨씬 행복하다고 눈물로 말했다.
김영오의 발목을 공업용 테이프로 묶은 다음 현금을 찾아 태워 없애고 장롱 서랍 등을 뒤져 범행 현장에 흩어 놓고 나서, 김보은도 손목과 발목을 묶고 김진관은 집을 나왔다. 김보은은 새벽 3시쯤 옆집에 가서 강도를 당했다고 알렸다.
그러나 21살 젊은이들의 허술한 위장은 금세 탄로 날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미심쩍게 생각한 형사가 김보은을 떠보기 위해 이렇게 말한다.
“아버지가 다행히 목숨은 구할 거 같은데..‘
괴물이 살아 돌아올지 모른다는 그 한마디에 김보은은 비명을 지르며 무너지고 말았다.
대법원까지 간 재판은 김보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김진관 징역 5년 선고로 끝났자. 김보은은 살인 혐의로는 이례적인 집행유예가 나왔고 김진관은 형기의 반을 특별감형받았지만 정당방위라는 변호인들의 논리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법원의 판단은 이렇다.
“김보은이 12살 때부터 의붓아버지인 김영오의 강간행위에 의하여 정조를 유린당한 후 계속적으로 성관계를 강요받아 왔고, 김영오로부터 행동의 자유를 간섭받아 왔으며, 또한 그러한 침해행위가 그 후에도 반복해 계속될 염려가 있었다면, 김보은의 신체나 자유 등에 대한 현재의 부당한 침해 상태가 있었다고 볼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하여도 피고인들의 살인행위가 정당방위나 과잉방위에 해당한다고 하기는 어렵다”
무엇이 정당방위일까?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자신을 지키는 정당한 방어 행위로 인정받을 수 있을까?
법도 인터넷도 인식도 부족하던 당시, 괴물을 죽이지 않으면 이 고통이 끝나지 않는다고, 울며 다짐했을 두 젊은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눈부시게 빛나는 21살 연인이, 스스로를 파괴함으로써 은폐된 악을 겨우 광야로 끌어낸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성폭력 특별법이 제정됐고 가정 내 성폭력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중년의 삶을 살고 있을 두 사람이, 가장 빛나야 했던 시절 벌인 가장 슬픈 살인을,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이유 아닐까?
그리고 묻게 된다. 지금은 법과 상식에 호소하면 정의롭게 해결되는 사회에 살고 있는지... 어디선가 더 잔인한 일이 아무도 모르게 벌어지고 있을지 모른다고, 경각심을 놓지 말라고, 저 슬픈 살인이 거듭 호소하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