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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Mar 15. 2019

의적인가 그냥 도둑놈인가

<<그 사건 뒤에는 무엇이 있나 -3>>

1983년 4월 14일, 3시를 조금 넘은 나른한 오후.

서울 서소문동의 법원에서는 늘 그렇듯 재판이 연이어 열리고 있었다.


서울구치소에서 재판받으러 온 15명의 피고인 가운데, 먼저 재판을 받은 8명은 나머지 7명의 재판이 끝날 때까지 3층 피고인 대기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 수갑을 차고 포승줄로 묶인 상태.


그중 한 명이 왼손이 너무 조여 아프다고 교도관에게 하소연한다.  교도관은 별생각 없이 왼쪽 수갑을 조금 느슨하게 조절해주고는 대기소를 밖에서 잠근 뒤 2층으로 내려가 동료 교도관과 얘기를 나눴다. 이때 왼손이 아프다고 했던 그 죄수가 수갑에서 왼손을 비틀어 빼낸다.  자유로워진 두 손으로 순식간에 포승줄을 풀고 문을 박차고 나왔다.  3층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고 지체 없이 창문 환풍기를 뜯어낸 뒤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렸다.  오른손에 수갑을 찬 채 죄수복 웃옷은 벗어던져 노란색 티셔츠와 죄수복 바지 차림으로 기어코 법원 담을 넘었다.


그는 쇠톱을 구해 수갑을 끊어낸 뒤 서울시내에서 도주를 이어가며 지인과 접촉을 시도했다. 경찰은 비상이 걸렸고, 탈주범 뉴스는 전 국민을 놀라게 했지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다들 두려워하고 겁을 낼 만도 한데 사람들 사이에서 그가 붙잡히지 않기를 바라는 묘한 분위기가 감지된 것.  탈주범을 응원하다니???


특별한 범죄인이었기 때문이다.  대도, 의적, 홍길동으로 불리던 ‘특별한’ 도둑 조세형이었기 때문이다.


조세형 탈주를 보도한 당시 한국일보 기사


탈주 6일째인 4월 19일 오전. 서울 장충동 주택가에서 조세형을 봤다는 신고가 들어온다.  출동한 경찰에 조세형은 이 집 저 집을 뛰어넘어 도주하다 마침내 어느 한 가정집에서 경찰에 포위됐다. 그 집 대학생을 인질로 잡고 스카이콩콩(80년대 대표적 놀이기구), 톱, 드라이버를 휘두르다 결국 경찰이 쏜 총에 맞고 검거됐다. 당시 일부 주민들은 경찰에게 총을 쏘지 말라고 항의인지 부탁인지 모를 소리를 질렀다고 한다.


전과 11범, 드라이버 하나로 부잣집과 고위층 집만 들어가 사람을 해치지 않고, 심지어는 훔친 금품의 일부를 노숙자와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줬다는, 그 전설의 도둑 조세형의 탈주극은 6일 만에 끝나고, 시민들은 쓰러진 홍길동을 안타까워했다.


인질로 잡혔던 대학생 김 모군은 나중에 이렇게 말한다.


“조세형이 경찰을 상대로 톱을 휘두를 때 내가 다치지 않도록 욕조에 밀어 넣었고 총을 쏘지 말라며 무릎을 구부려 나를 가려준 걸 볼 때 일반 흉악범과는 질이 다른 거 같아요. 방학 때 면회라도 가 볼 생각이에요”


자신을 인질로 잡았던 탈주범을 면회하고 싶다니... 역시 의적 홍길동은 다르다는 감탄이 이어지면서, 불똥은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검거에 결정적 기여를 한 신고자한테 힐난이 몰린 것. 신고자 이 모씨는 나중에 이렇게 난감한 심정을 토로했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정부에서 수배한 사람을 신고했을 뿐인데 사건 직후 조세형에게 쏠리는 사회 일부의 동정심 때문에 착잡했어요”


부도덕한 관군에 잡힌 의적 홍길동을 상상하듯, 타락한 권력에 잡히지 말고 정의로운 의적 활동을 더 해주길 바라는, 참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마음들이 커져 갔다. 그리고 그 애틋함은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결코 사그라들지 않았다.


15년이 지난 1998년 11월 26일.


서울구치소 앞에는 수많은 취재진과 환영객들이 누군가의 출소를 기다리고 있었다. 후원자들이 마련해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온 사람은, 그렇다. 조세형이었다. 꽃다발까지 전달되고 기자들은 그의 한마디도 놓치지 않았다. 상습 절도로 15년이나 살고 나온 범죄자는 마치 정의로운 정치범 인양 인터뷰에 응한다.


“예전의 조세형은 잊어주십시오 “


1998년 환영받으며 출소하는 조세형 (MBC뉴스)


39살에 수감돼 15년 뒤인 54살 나이로 구치소를 나온 ‘특별한’ 도둑 조세형은 역시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대도의 경험을 살려 사회에 기여하고자 보안회사에 취직하고 기독교에 귀의하고 건실한 삶을 살겠다고 선언했다.


물건을 훔치는 대도의 삶은 끝났지만 어쩌면 모두의 마음을 훔친 진정한 대도일지 모른다고 시민들은 초로의 홍길동한테서 또 다른 감동을 받았다. 이상하게 훈훈해지는 정말 매력적인 도둑이라고, 사람들 사이 미담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그로부터 3년 뒤 일본에서 희한한 뉴스가 날아온다.


도쿄 시부야 주택가에서 빈집을 털던 절도범이 일본 경찰에게 칼을 꺼내 들고 저항하다 총탄을 맞고 붙잡혔는데... 아뿔싸 그는 조세형이었다.


처음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우리의 영웅이 일본에서 빈집을 털다 걸리다니 믿을 수 없었지만 사실이었고, 게다가 흉기를 들고 저항하다 검거됐다는 소식엔 더더욱 난감했다.


3년 반을 일본 감옥에서 보낸 뒤 조용히 귀국한 조세형은, 그런데 또다시 서울 서교동 가정집에 침입해 금품을 훔치다 붙잡힌다. 다시 3년형. 출소한 뒤 2013년 서초구 빌라에 침입해 또다시 절도를 벌이다 검거, 또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때도 만년필로 경찰에 저항한 조세형, 비폭력주의자이자 대도는 어디로 갔다는 말인가. 다시 출소했지만 또 좀도둑 조세형의 소식이 들려온다.. 이제는 거의 포기 상태. 2015년 9월 한남동 고급빌라에서 절도 혐의로 다시 검거돼 징역 3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2013년 옷을 뒤집어쓴 채 절도 혐의로 조사받는 조세형


조세형은 추락한 것인지 도둑질이 습관인 원래 그런 사람인지, 세상은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니 그의 신화는 하나하나 이상하지 않은 게 없다. 고위층만 턴다고 했지만 좋은 집에 들어가야 훔칠게 많을 테니 굳이 의적의 조건으로 보기도 뭐한 게 사실이다. 큰 집으로 들어가다 보니 고위층 집에 들어간 것이지 알고 들어간 게 아니었다는 것.


그리고 폭력을 쓰지 않는다고 했지만 실은 그는 자주 흉기를 들고 경찰에 저항했다. 드라이버로 톱으로 칼로 만년필로, 그리고 엄청난 무기가 될 수 있는 스카이콩콩도 휘둘렀다. 그리고 정말 가난한 사람들에게 훔친 물건을 나눠줬는지는 그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다.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거지 아무도 확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조세형을 검거했던 형사는 이렇게 회고한다.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긴 뭘 나눠줍니까, 자기 먹기도 바쁜데... 만날 붙들리면 자기 미화하려고 그렇게 말했던 거죠”


1980년대 초반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에 국민 모두가 고개를 푹 숙이고 움츠리던 시절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은 나서지 못했지만 누군가 나 대신 나서 부도덕한 사회를, 부도덕한 사람들을 응징해주길 바라는 마음 아니었을까? 그 마음들이 모여 모여서 대도, 정의로운 도둑 조세형이 만들어진 건지도 모르겠다.


의적 대도 홍길동이란 실제로 있었던 게 아니라 어쩌면 그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사람들의 간절함만이 가득했다고,  쓸쓸한 느낌으로 회고하게 된다. 의적은 어디에도 없고 그저 서민들의 허전한 마음속에만 있었던 상상의 연인 같은 존재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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