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추리 Apr 10. 2019

죽음 직전 패륜 아들 발목을 물었다

<<그 사건 뒤에는 무엇이 있나-4>>

1994년 5월 19일 새벽, 23살 박한상은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기이한 행동을 시작한다. 자신의 방에서 옷을 다 벗고는 침대 시트를 뒤집어썼다. 그리고 안방으로 조심스럽게 향한다. 알몸에 침대 시트만을 걸친 채 손에는 등산용 칼을 움켜쥔 그야말로 기괴한 모습이었다.


소리 없이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예상대로 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잠들어 있었다. 그를 소중히 여기며 키워준, 여느 부모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그런 어머니와 아버지를, 그는 들고 있는 칼로 주저 없이 찔렀다. 그냥 한번 찌른 게 아니라 난자, 그야말로 마구 찔렀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각각 40여 차례나 찌른 것이다. 


어머니는 별 저항을 하지 못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향해 격렬히 맞선다. 칼에 찔려 목숨이 스러지는 순간, 아들의 발목을 온 힘을 다해 물었다. 짐승보다 못한 자식에 대한 초인적인 분노였을까, 아니면 바로 ‘이 놈이 범인’이라고 증거를 남기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을까?


박한상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망을 확인한 뒤 목욕탕으로 들어가 온몸을 깨끗이 씻었다. 자신의 몸에 튄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를 모두 지운 것이다. 미리 옷을 다 벗은 건 이렇게 혈흔을 쉽게 지우기 위한 계산이었다.


깔끔해진 몸에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아버지 차를 몰고 나간다. 칼과 침대 시트를 공터에 버린 다음 다시 집으로 돌아와 휘발유를 안방에 끼얹고 불을 질렀다. 모든 게 계획대로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순서. 천천히 집 밖으로 나와 화재 신고를 직접 한다. 집에 불이 났다고, 빨리 부모님을 구해달라고...


장소는 서울 삼성동 고급 주택. 집주인은 백억 대 자산가로 알려진 당시 한약협회 서울지부장. 박한상의 기대와 달리, 단순화재가 아닌 건 정밀한 수사를 하기도 전에 드러났다.  부부 시신에서 흐르는 피와 수십 군데 찔린 상처를 본 경찰은 명백한 살인 사건으로 판단하고, 당연히 금품을 노린 범행으로 수사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도대체 어떻게 이런 잔인한 강도가 있을 수 있나, 원한에 의한 범행일까, 경찰은 ‘설마’ 하면서도 신고자인 아들을 쳐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경찰의 관찰에 한 가지 이상한 모습이 포착된다. 병원에 가겠다고 옷을 갈아입는 박한상의 발목에서 물린 듯한 상처를 발견한 것. 물론 그 상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고 확인하자고 요구하기는 더더욱 여의치 않았다. 하지만 아버지가 남긴 그 표식은 ‘설마’에서 ‘혹시’로 의심의 농도를 달리하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혼신을 다해 남긴 그 분노의 흔적은 패륜 아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단단히 붙잡는 족쇄가 됐다.

 

검거 직후 박한상


마침내 결정적 증언이 나온다. 박한상을 진료한 간호사는, 박한상의 머리에서 피가 보여 머리에 상처가 있는가 봤더니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고 경찰에 진술했다. 박한상은 자신의 머리에 피가 튄 것은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온몸을 깨끗이 씻었으니 혈흔을 싹 다 지웠다고 믿고는 머리를 감지 않았던 것이다.


경찰은 머리의 혈흔이 그의 부모의 피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물린 흔적이 아버지의 치아구조와 일치한다는 증거도 확보한다. 박한상은 범행 6일 만에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대한민국 범죄 역사상 최악의 패륜 범죄로 기록되는 박한상 부모 살인 사건은 이렇게 해서 세상에 그 잔혹한 실체를 드러냈다.


한약상인 아버지는 박한상이 가업을 잇기를 바랐다. 한의대에 진학해 자신이 이뤄놓은 것을 아들이 더 확장시키길 기대한 것. 그러나 부잣집 맏아들 박한상은 공부에 집중할 생각이 없었다. 대학을 다니다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조기 유학 열풍이 서서히 불던 시절, 준비도 목표도 의지도 없이 외국으로 나간 박한상은 도박에 빠져 돈을 물 쓰듯 하고 아버지의 분노는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버린다.


“너는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놈이다, 그렇게 말썽을 피우려면 호적을 파가라”


아버지 질책이 커질수록 부모만 없으면 모든 재산이 자기 것이 되고 그럼 죽을 때까지 자기가 원하는 재미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잔혹한 확신에 빠져들었다. 그는 칼과 휘발유 등을 구입하고 미국에서 봤던 살인 영화들을 참고해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1심 재판부는 사형을 선고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형이 빈발한 사회는 올바른 사회가 아니라는 판단 아래 사형을 피할 수 있는 명분을 찾기 위해 고심해왔습니다. 그러나 찾을 수 있는 명분이라곤 고작 피고인의 부모가 살아있을 경우 아들의 사형을 원치 않을 것이라는 추측뿐이었습니다”


1995년 8월 사형이 확정됐지만 그는 지금까지 24년째 사형수로 여전히 복역 중이다. 1997년 12월 30일 23명의 사형을 집행한 이후 지금까지 죽임을 당한 사형수는 없다. 박한상은 이 마지막 사형 집행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50살이 다된 지금까지 사형수로 교도소에서 살고 있다.


박한상은 정신병자도 아니었고, 성실하지 않고 놀기를 좋아하긴 했지만 특별히 이상한 성격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그러나 유례를 찾기 힘든 잔인함을 보였고 판단력이 멈춰버린 미성숙자였다.

 

박한상 사건 이후 자녀 과잉보호 문제를 보도한 뉴스 

1990년대.. 억압적인 1980년대와 달리 자유롭고 풍요로운 혜택을 받는 젊은 세대가 등장했다. 풍요 속에서 자신의 삶을 어떻게 꾸려갈지는 오히려 생각을 닫아버린 젊은이들도 그 속에 있었다. 오렌지족이니 도피성 유학이니 하는 말들은 그 시대의 표현들이다.


욕망의 충족이 가능해지자 그 욕망의 충족만 바라보는 미성숙자들의 등장을 충격적으로 알린 박한상 사건... 우리 사회가 이후 마주할 새로운 유형의 문제를 가장 잔인하고 비현실적으로 예고한 참극 아니었을까...  


그리고 모든 판단이 왜곡돼버린 잔인한 미성숙자는 아버지의 그날 밤 저항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의적인가 그냥 도둑놈인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