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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Apr 17. 2019

탈주범의 질타에 고개 숙인 대한민국

<<그 사건 뒤에는 무엇이 있나-5>>



1988년 10월 8일, 서울 영등포 교도소에서 미결수 25명을 태운 이감 차량이 공주교도소를 향하고 있었다. 올림픽대로를 거쳐 중부고속도로에 접어든 순간, 미결수 몇 명이 감추고 있던 쇠꼬챙이 등을 이용해 수갑과 포승줄을 조심스레 풀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교도관들을 제압하고, 차량을 다시 서울로 돌린다.


서초동으로 돌아온 이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도망칠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반으로 나뉘었다. 12명은 달아나고 13명은 그 자리에 남았다.


영화 같은 탈주극은 이렇게 시작됐다.


탈주범들은 교도관한테서 권총과 총알 5발을 빼앗았다.


달아난 12명 중 5명은 곧바로 검거됐지만, 권총으로 무장한 나머지 7명의 도심 도주극은 일주일 동안 이어진다.


안암동 행당동 등지에서 도주를 이어가던 중 추가 검거자가 나오고,

10월 15일 밤, 네 명이 서울 북가좌동 주택가에 등장한다.


두목 격인 30대 중반의 지강헌과 20대 초반의 안광술 한의철 강영일.


이들은 고 모씨 집에 침입했다. 일가족 5명을 인질로 잡고 술을 마시다 결국 모두 잠이 들었고, 고 씨는 새벽 무렵 집을 빠져나와 근처 파출소에 신고한다. 경찰은 즉각 집을 완전히 포위하고는 지강헌 일당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자수하기를 바란다, 솔직하게 깨 놓고 말하는데, 아예 도망갈 생각은 하지 마라”   


거친 탈주범에 거친 경찰이 맞서는, 위험한 대치가 시작됐고, 이 상황은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됐다. 유례없는 인질극 중계방송이었다.


권총을 들고 대치하고 있는 지강헌 (MBC뉴스 화면)


분명 시작은 주민을 붙잡은 공포의 인질극이었는데, 상황은 점점 의외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무도한 인질극에서 우리 사회에 대한 고발극으로으로 말이다.


인질이 다칠까 경찰은 섣불리 작전을 진행하지 못하고, 탈주범들의 가족들이 현장으로 달려와 제발 자수하라고 눈물로 호소했다. 그러나 모두가 감당하기 어려운 방향으로 치달으면서, 이들은 극단의 흥분상태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분노와 자기 연민이 뒤섞이면서, 그날 낮 12시, 상황이 종료되기까지, 자신들이 이 사회에 품고 있는 불만, 분노 그리고 나름의 통찰을 두서없이 격한 목소리로 마구 쏟아냈다.


지강헌은 “나는 국민학교(초등학교)밖에 못 나왔어. 국민학교 밖에 못 나왔지만 나 그동안 생각했다,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자기 인생을 버렸다”라고 외쳤다.


앞뒤 맞지 않는 말을 늘어놓았지만, 사회 밑바닥에서 힘겨운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아들었다.


지강헌은 5백 여만 원을 훔친 혐의였다. 그런데도 동종 전과로 인해 징역 7년에 보호감호 10년, 도합 17년을 사회에서 격리될 처지에 몰려 있었다. 지강헌은 면회 온 가족들에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수감생활에 극도의 우울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안광술 한의철 강영일은 공범이었다. 이들 역시 지강헌과 처지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정집 등에 침입해 모두 5차례에 걸쳐 금품을 강탈한 혐의인데, 총액수가 630만 원이었다. 역시 동종 전과로 인해 징역 7년에서 징역 15년까지 중형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이제 21살인 안광술은 “어떻게 죄수가 판사 검사를 살 수 있는 거야? 사람을 죽이고도 나가는 사람이 있다”라고 외쳤다. 도대체 그가 이런 말을 할 근거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고, 그가 잘못된 ‘팩트’를 가지고 분노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20대 초반의 그의 경험에서는 오해일 수도 있지만, 그의 말이 우리 현실 어디에선가 분명 벌어지고 있는 ‘실화’ 임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했다.


명백한 범죄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들의 항변에서 ‘흉악범’의 흔적이 아니라 ‘돈과 권력 없는 사람’의 서글픔을 읽으며, 그들의 절망에 공감했다.


이 사회를 한탄하면서 그들이 정리한 말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이 사건을 상징하는 단어이자, 한국사회를 상징하는 단어로 한동안 굳어진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뭔가를 외치고 있는 지강헌 일당


인질이었던 고씨의 첫째 딸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남자들은 정중한 태도로 존대 말을 쓰고 있었다. 협박하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인질극은 미화되거나 할 그런 가벼운 일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인질에 대한 이런 태도로 인해 그들의 절규는 범죄자들의 헛소리가 아닌 진정성 있는 뭔가로 다가온 게 사실이다.(지강헌은 도주중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자신들은 시민들을 해치지 않을 것이니 보도를 똑바로 해달라고 말하기도 했다) 경찰과 대치하며 인질에게 칼을 들이대는 순간에도 “미안하다 정말 이럴 생각 아니었다, 절대 다치지 않게 할 테니 조금만 참으라고 말했다”라고 고씨의 딸은 전했다.


인질극은 비극으로 끝났다.


다섯 발의 총알 중 두발은 경찰을 위협하는 데 사용했고, 한 발은 강영일을 자수하라고 내보내면서 위협하는데 썼다. 나머지 두발을 가지고 안광술 한의철은 자살했고, 총알이 떨어진 지강헌은 깨진 유리창으로 자해를 하던 중 경찰 총탄을 맞고 숨진다. 밖에 나와 있던 강영일은 체포돼 19년을 복역하고 2007년 6월 출소했다.


평범하게 제대로 살고 싶었다, 그러나 사회의 벽과 차별은 너무 심하다, 그리고 돈과 권력 있는 사람은 다 피해 가고 없는 사람들만 죽어 나간다는, 그들의 무절제한 쏟아냄을 생방송으로 지켜본 국민들은 그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보다는 애처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범죄의 구렁텅이에서 지내다 느닷없이 우리 사회를 꾸짖게 된 젊은이들의 질타에 당시 대한민국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1981년 전두환은 정의사회 구현을, 1988년 노태우는 보통사람 시대를 정권의 구호로 내세웠지만 당시 우리 사회가 정의사회는 물론 아니었고 보통사람 시대는 더더욱 아니었기 때문이다.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아닌 사회를 지강헌 사건 이후  만들어왔는지는 더욱 아픈 질문이다.  30년 전 사회 밑바닥 탈주범들의 외침은 이후 우리 사회가 마주할 핵심적인 과제를 예견한 것 아닐까... 과연 우리 사회는 이제 그런 터무니없는 곳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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