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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추리 May 19. 2019

조선인은 뒤통수가 평평하다?

<<보이는 거와 많이 다른 일본 -12>>




1923년 9월 1일 오전 11시 58분. 규모 7.9의 강진이 도쿄와 요코하마 등 수도권 인구 밀집지역을 강타했다. 엄청난 흔들림도 공포스러웠지만 인명 피해는 대부분 화재 때문이었다. 44만 가구가 불타 없어지고, 10만 명 가까운 사람이 화재로 사망했다. 도쿄는 그야말로 불바다였다.


일본의 전통적인 목조 가옥은 태풍이나 홍수에는 의외로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화재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정오 직전 점심 식사 준비를 위해 작동한 화기들이 엄청난 화재의 한 원인이 됐다. 도쿄는 전화 수도 전기 교통 같은 모든 도시 기능이 마비되고, 사흘 내내 불길이 잡히지 않아 공포와 절망의 공간으로 변모했다.


1923년 관동대지진 (위키피디아)


유언비어가 돌기 시작했다. 후지산이 폭발했다, 수도를 곧 옮긴다 같은 소문까지는 세상이 망할 것 같은 두려움에서 나온 용인 가능한 ‘가짜 뉴스’였다. 그러나 그 차원에서 멈추지 않았다. 조선인이 불을 지르고 폭탄을 던지고 우물에 독을 넣었다고 타깃을 정한 공격이자 저주가 퍼져나갔다.


혼란을 조선인들이 가중시키고 이용하고 있다고 몰아간 것이다. 조선인은 아주 비열한 사람이 됐고, 무자비한 집단 광기가 조선인들을 향하기 시작했다. 공적인 영역은 이런 유언비어를 막고 사회를 안정시켜야 했지만, 언론은 조선인에 대한 유언비어를 확대해 보도했고, 행정당국은 조선인의 위험 행동을 조심하라는 공문을 발송했다. 소문을 공식적으로 확인해준 것이다.(나중에 사실이 아니라고 했지만, 이미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 뒤였다)  


자경단이 각지에서 조직됐다. 그리고 ‘자구책’으로 조선인 선별작업에 나선다. 조선인 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겉으로 봐선 잘 구별되지 않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외형적 유사함 때문에 오히려 더욱 집요하고 잔인하고 절망스러운 색출 작업이 벌어졌다.


당시 조선인들은 주요 건설 현장 등에 집중해 살았기 때문에, 보통의 일본인들이 일상적으로 자주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조선인들을 찾아내라! 그들은 조선인 판별법이 필요했고 공유했다. 먼저 외모로 조선인으로 의심되는 이들을 걸러냈다. 그들의 기준은 이런 식이다.


“조선인들은 뒷머리가 평평하다”, “쌍꺼풀이 없다”, “키가 크고 머리가 길다”, “수건을 쓰고 있는 경우가 있다”, “인부의 탄 얼굴에 유의하라”


그다음엔 구체적인 확인 질문이 들어간다. 조선인들이 어려워하는 발음으로 질문을 만들었다. 55엔(고쥬고엔) 같은 탁음, 파피푸페포 같은 파열음을 발음해보도록 시킨 것이다. 그리고 기미가요나 일본 전통 민요를 불러보게 하고, 태어난 해의 가장 중요한 사건을 질문하기도 했다.


이렇게 찾아내서 6천 명가량을 학살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당시 재일조선인 인구의 약 15분의 1에 해당한다.


도쿄에는 강이 여러 개 있다. 그중에 도쿄 북쪽에서 동쪽으로 그리고 남쪽으로 크게 감싸고 돌아가는 아라카와는 강폭이 가장 넓은 큰 강이다. 도쿄 도심에서 나리타 공항을 갈 때 창밖으로 이 강을 보게 될 것이다. 야히로 역에서 가까운 ‘키네가와바시’라는 다리에 가까이 가게 된다면, 다리 바로 아래를 바라보자.


조선인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라카와 강변


키네가와바시 밑 둔치는 1982년 조선인 유골 발굴 사업이 진행됐던 현장이다.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이 벌어지고 시신을 매립했다는 인근 주민들의 증언이 잇따라 시민단체에서 발굴 사업을 실시한 장소다. 유골은 발견하지 못했다. 그러나 조선인 학살의 잔인한 기억을 잊지 못하는 곳이고, 또 잊지 않겠다는 소수의 일본인들의 노력이 있는 곳이다.


일본에서 조선인은 언제든 배제하고 차별하고 심지어 제거할 수도 있는 대상이었던 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미 1913년 ‘조선인 식별에 관한 건’이라는 매뉴얼을 일선 관청과 경찰에 배포해 일상에서 조선인을 구별하는 방법을 공식적으로 나누고 있었다고 한다.


구별과 차별과 배제의 준비를 철저히 해오던 일본 사회에서 관동대지진은, 마치 “자 우리가 준비한 작전을 실시할 때가 왔다”라고 그들끼리 은밀히 눈빛을 맞춘 듯한 서늘한 느낌이다. 그래서인가 이 문제를 천착해온 야마다 쇼지 교수는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은 관과 민의 공동책임이라고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일본 사회와 일본인은 조선인에 대해서 '같음'이 아니라 '다름'을 계속 찾아왔고, 그들이 찾은 다름에는 결국은 혐오의 감정이 자리하고 있음을 직면하게 된다.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본 내 혐한 운동이 괜히 뜬금없이 나온 게 아님을 비로소 알 수 있기에 더욱 우울해진다.  인종적 언어적 민족적 구별과 차별의 뿌리 깊은 역사를 마주하면 할수록, 아름답고 미래지향적 한일관계란 결코 간단한 여정이 아니겠구나, 과연 오긴 오는걸까... 쉽지 않음을 인정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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