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지기 전 베트남에 갔습니다. #26

맥주 선택 2

by 영순

두번째 맥주의 캔을 땄다. 역시, 기가 막힌 소리가 났다. 두번째 캔을 들이키고 맛을 음미하자 이번에는 밍밍한 맛이 났다. 이 맥주 역시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기분은 아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과일칩 안주를 더욱 음미할 수 있어서 좋았다.




"아~ 베트남 맥주는 이런 맛이구나. 새롭네."




순간 내 마음에 깜짝 놀랐다. 내가 왜 이렇게 너그러워졌지? 맥주가 입맛에 맞지 않는 것이 그다지 화낼 일은 아니지만, 입맛에 맞지 않는 맥주를 끝까지 먹으면서도 난 왜 기분이 좋지?




만약, 한국에서 내가 조금 늦게 도착한 약속 장소에 친구가 이 맥주를 시켜놨으면 "야~ 뭔 맥주를 이런 걸 시켜놨어."라며 타박하고 내가 좋아하는 맥주를 시켰을거다.




왜 이렇게 내 마음이 너그러워졌는지, 온전히 지금 이 시간에 머무를 수 있는지 생각해봤다. 이유는 3가지 였다.




첫째, 어느 맥주를 마실지, 어느 맥주를 버릴 것인지, 언제까지 마실지 온전히 내가 통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극심한 고통은 통제 불가능함과 그 지속성에 있다. 한국에서 내가 겪은 일들은 온통 통제 불가능한 일들 뿐이었다.




둘째,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나에게 어떤 피해나 손상도 오지 않는다. 즉, 맥주 선택은 리스크가 전무한 일이다.




셋째, 마감기한 같은 압박이 없다. 그 어떤 스트레스도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나는 설레임, 기대, 기쁨, 만족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시간에 온전히 머무를 수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면 나의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을 것이고, 소꿉장난 같은 맥주 선택은 한낱 장난에 불과하다고 여길지 모르는 일이었는데도, 내가 그 시간을 온전히 음미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작은 기대가, 아주 작은 설레임이, 아주 작은 만족이, 아주 작은 행복이 나를 치유하고 채워주어 이전과는 다른 나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