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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밥에 화가 납니다.

된장찌개와 계란찜도요.

by 영순

김이 모락모락 나는 뜨거운 밥,

뚝배기에서 보글보글 끓는 된장찌개,

전자레인지에서 막 꺼낸 노란 계란찜


생각만해도 화가 나는 것들이다.


휴....




당연히,

저런 음식이 준비된 걸 알고 있는데,

"빨리 와서 밥 먹어.

식사 준비 다 되었어."라는 말을 들으면

다시 화가 난다.


휴....




그래서,

난 저런 음식들이

준비되는 것을 피하거나,


저런 음식을 준비하고,

얼른 밥먹으러 오라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하며 살아왔다.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

시작한지 한참 후에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나는 어렸을때부터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했다.


뜨거운 것을 입에 넣으면

혀가 막 데이는 것 같았고,

씹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뱉지도 못하고,

후후 불어도 너무 뜨거워서

힘들었다.


그렇다고, 식은 다음에

다시 오겠다고 자리를 일어났다가

다시 올 수도 없었다.


나는 유난히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명절이 되면,

큰 집에 사촌, 육촌들이 모이고,

여러 가족들이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기억이 많다.


서로 우애가 좋았고,

늘 즐거웠던 것 같다.


식사 시간이 되면,

사촌, 육촌들 가운데

제일 대장격인 나이 많은 몇명이

5분도 안되서 밥을 먹고 일어나서,

방으로 들어가서 먼저 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두 순차적으로

재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은 모두 방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하는 나는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밥을 절반도 채 먹지 못했다.

전부 어른이고 나만 아이였다.


어른들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식사를 하기에,

식사 속도가 더디지만,

나보다 더디지는 않았다.


드디어 어른들이

식사를 모두 마치고,

설거지를 해야하는 여자 어른들이

나를 쳐다보며

"뜨거운 걸 못 먹는구나!" 하고

한 마디씩 건넨다.


더러는 미소짓기도 하고,

더러는 그 웃음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게 하는 웃음들도 있었다.


매번 명절때마다 반복되는

이런 상황이 싫어서,

나도 큰 마음 먹고,

뜨거운 것을 제대로 씹지도 않고

몇 번 넘겨보았으나,

견딜 수 없이 고통스러웠다.


그렇다고, 음식을 남길 수도 없고,

밥이랑 국을 뜨는 어른에게 가서,

"전 조금만 주세요."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난 언제나,

뜨거운 것을 먹지 못해,

혼자 남겨졌고,

사촌, 육촌들은

그런 나에게 보란 듯이

더 빨리 먹고 방으로

경쟁적으로 전부 들어가버렸다.


누군가는 웃으며

내게 말했다.


"와 이리 뜨거운 걸 못 먹노?"

(경상도 사투리에,

부정적 기억이 많아,

난 지금도 경상도 사투리가

너무 싫다.)


이젠 익숙해져서

그런 나를 알아버린 어른들이

괜찮다고 천천히 먹으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그렇게

밥을 먹었다.


내가 식사를 끝내면,

그 즉시 설거지가 시작된다.


설거지는 나 때문에 지연된 것이었다.




난 지금도 뜨거운 음식이

너무 너무 싫다.


뜨거운 것이 혀에 닿으면

즉시 화가 난다.

분노에 가까운 화가 말이다.


난 이틀 지난 찬 밥에,

말라비틀어진 튀김,

돼지 기름이 떠서 허옇게 굳은

음식을 줘도 괜찮다.

아무 감정이 없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싶다.


이런 음식에는,

연결된 부정적 기억이나

부정적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뜨거운 음식은 다르다.

언제나 나를 날카롭고

예민하게 만든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 알았다.


뜨거운 음식에 내 마음이

이렇게 반응하는데는,

어렸을 적, 수년간 반복되었던 그 기억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고,

그 감정이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내 감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내 마음을 돌아보고,

돌본 후에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내 마음에 말해주었다.


"괜찮아.

뜨거운 걸 못 먹는게 뭐 어때서?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뜨거운 거 먹는 실력이 안 느는거보면,

이건 타고난거야.


이젠 뜨거운 거 못 먹는다고

눈치주는 사람도 없고,

경쟁하듯이 더 빨리 먹으며,

웃으며 방으로 들어가는

사촌, 육촌들도 없어.


지금은 그때가 아니야."


그리고, 식사를 준비한 누군가가

"아니, 식사 다 되었다니까

왜 빨리 안와.

밥이랑 국 식는데?"라고 짜증을 내도,

거기에 반응하지 않는다.


준비된 즉시 가면,

그 음식을 먹고 내가 화가 나므로,

조금 식기를 기다려서,

즐겁게 식사를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에게, 매번 미지근한

음식을 준비하라고 할수는 없으니까...




과거의 기억과 경험, 감정이

지금도 나를 괴롭힌다면,

그것을 누가 일으켰는지,

누가 범인인지 잡아내고

분석하는게 아니라,


지금은

그때가 아님을,


지금은

나는 훌쩍 커버린 어른임을,


지금은

충분히 내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음을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과거의 족쇄에서 벗어날 수 있음을

이제는 안다.


마음을 돌아보고

기억을 더듬는 일은

그렇게 조금씩 나를

자유롭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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