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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 하나에도

고통 속에 기쁨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by 영순

요즘 나는

매우 혹독한

겨울을 지나고 있다.


아니, 그런지 꽤 오래 되었다.




요즘 나는

빛 한점 들어오지 않는

어둠을 지나고 있다.


아니, 그런지 꽤 오래 되었다.




더욱 차갑고

더욱 암울한 것은

그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 삶에서

이토록 긴 겨울과

긴 터널이 있었던가.




어젯밤,

자정이 다 되어 가는 시간에

주방으로 나와

오렌지를 하나 잘랐다.


배고픈 것도 아니었고,

출출한 것도 아니었는데,

나는 내 속에 무언가를

채우고 싶었나보다.


오렌지를 한 조각 입에 넣고,

난 깜짝 놀랐다.


태어나서 지금껏 먹었던

그 어떤 오렌지보다도

달았다.


아니, 왠만한 귤이나,

한라봉, 천혜향보다

훨씬 달고 맛있었다.


오렌지는 원래 딱딱하고,

육질이 두껍고,

신 과일이다.


그 와중에 약간의 단맛이

오렌지를 먹게 하는

매력이 아닐까 생각해왔는데,

어제 먹은 오렌지는 너무나도 달콤했다.


육질이 부드러웠고,

과즙이 많았고,

단맛이 풍부했고,

기분 좋은 신맛이 있었다.




가족들에게

이 오렌지가 너무 달다고,

이거 어디서 사온거냐고 기쁘게 물으며

대화거리를 만들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최근 나는,

늘 어두운 얼굴에

처진 발걸음이었고,

시선이 마주치면

눈물이 날까봐

말할때도 다른 곳을

쳐다보곤 했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갑자기 오렌지가 너무 맛있다며,

호들갑을 피울 순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늘 하던대로

그 모습 그대로

오렌지를 조용히 먹었다.




너무 맛있어서,

하나를 다 먹고,

하나를 더 먹었다.


먹는 내내

너무 맛있었다.


기쁨과 달콤함으로

배가 불렀다.




삶 자체가 고통이고,

빛도, 희망도 보이지 않고,

의지도, 노력도 소용없는

지금 상황에서,

오렌지가 이렇게 순수하고

단순한 기쁨을 줄줄은 몰랐다.


난 조용히 방으로 들어가

잠을 청했다.




잠을 들려고 하니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언제든 우린 순간순간의

작은 기쁨을 느낄 수 있구나.




타인의 시선 때문에

힘들 땐 웃는 것조차

삼켜야한다는 생각이

나를 더 고통스럽게 하는구나.




우리의 삶은

여러가지가 섞여있을 수 있구나.

좋은 일만 일어날수도 없고,

나쁜 일만 일어나는 것도 아니구나.




내 고통은

오렌지 10만개가 있어도

해결되지 않을 고통인데,

오렌지 2개로 잠시나마

숨쉴 수 있는 걸 보면,

내 고통은 얼마든지

완화시킬 수 있는거구나.




행복한 사람이라고

고통이 없는 게 아니고,

고통이 있는 사람이라고

불행해야 하는 게 아니구나.




고통, 기쁨, 불행, 행복이

A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물 B라고 생각한다면,

나의 해석 알고리즘이 다양하다면,

언제든 내가 원하는 감정을 느낄 수 있겠구나.




1억이 생겨야 행복해진다고

해석 알고리즘을 정해두면,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나는 고통에서 풀려날 수 없을 것이고,


1억이 생겨야 행복해지겠지만,

오렌지 하나에도 웃을 수 있다고

'예외 해석 알고리즘'을 정해두면,

난 고통 중에도 얼마든

기쁨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보다 조금은 더

어른이 된 것 같아서

잠시 기분이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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