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험소녀 Jun 18. 2016

과장으로 과장하지마

그냥 있는 그대로의 저를 봐주세요

시베리아 횡단열차에 올라탄지도 한참 됐는데,

가슴 속에선 러시아를 품고 지내면서도 삶 속에서 여전히 이해되지 않거나 떠나지 않은 생각들이 많다. 그래서 쉽사리 여행기를 이어가지 못하고 있는가보다.


운명의 아이러니(출처: http://muzztop.ru)

러시아 영화 중에 "운명의 아이러니(Ирония судьбы)"라는 소비에트 시절 영화가 있다. 한 남성이 술에 취해 자신의 집이 있는 모스크바가 아닌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가게 됐는데 공교롭게 거기도 동일한 이름의 거리에 똑같은 아파트가 있어 자기 집인줄 알고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가 들어간 곳은 자신의 애인과 새해를 보내기 위해 한창 준비하던 한 여성의 집이었는데, 처음엔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다가 티격태격 결국 둘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희한하면서도 웃긴 스토리다. 그냥 운명이 장난친거라고 보면 된다.


가끔 살면서 이해도 안되고 황당할때 이 영화를 떠올리곤 하는데, 다 하늘의 뜻이 있겠지 순응하려 하다가도 현실은 그 결과가 늘 영화같지만은 않으니 속상할 따름이다.


아무튼 이 이야기를 꺼낸 것도 나에게는 과분하고 말도 안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가짜 '호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회사를 다니던 때 나를 부르는 호칭은 '과장'이었다. 생각해보면 과장에는 너무나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 

사원보다는 높은 경력으로 아는 것도 많고 주워들은 것도 은근 많으며, 대리보다는 업무가 더 부여되기는 하지만 책임만 있고 결정적으로 결정권은 없어 결재를 받기위해 항시 대기하고 있는 실무자이다. 한 마디로 일을 많이 해서 날개는 달고 있지만 재량권은 없는 낑긴 위치다. 그냥 "일을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인 거다.


나에게 이 호칭은 다소 과분한 축에 속했다.

아는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해왔던 일이라고는 상사님 조종으로 타자기 두드려 열심히 교정작업 첨삭 받아 해온 것 그 뿐인데. 책임져야 할 일은 너무도 많았다. 더욱이 과분할 수 밖에 없던 이유가.. 실제의 내 직분과 대외적으로 보여지는 나, 이 불균형했던 둘을 연기하며 지내야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나를 '과장'으로 불러주는 것이 그냥 "일 많이 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예의상 그렇게 불러준 것 같았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일을 해왔으니까, 과장이라는 호칭에 걸맞기 위해 무척 애를 쓰며 스스로를 과장해왔다.


그렇게 일에 내 스스로를 빠뜨려가며 정말 나를 잊어갔던 때도 많았다. 마치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그래. 난 과장이니까 일을 해야 해...


뻔뻔한 사람들 같으면 자신이 불리할 때 '내가 어디회사 누구 과장이야'라며 떠들고 다녔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는 그런 가장된 삶은 싫었다. 그냥 나는 나 자신인데 나를 과장이라는 포장지에 넣어서 내놓고 싶지 않았다. 실제 과장도 아니었는데 뭘!

실제의 나, 그리고 보여지는 나

문제는 회사를 나오고 나서도 만나는 회사 사람들은 나를 그냥 '누구 과장님'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달리 호칭이 애매해서 그렇기도 하지만, 그냥 계속 열심히 일해왔고 열심히 일할 사람으로 불리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사람은 자신이 입은 옷에 따라서 행동도 달라진다고 한다. 과장이라고 불렀을 때는 거기에 맞게 깍듯하면서 일에 열심인 모습을 보여줬었다. 하지만 회사가 만들어놓은 경직된 직분으로서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냥 나 자신을 보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늘 가지고 있었다. 지금은 그 옷을 벗어던지기는 했지만 만나는 사람들이 자꾸 다시 입히고 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은 소시민일 뿐이지, 일을 많이 해야하는 사람이고 싶지는 않다. 그리고 실제의 나와 보여져야 하는 내가 달라야 하는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이건 내가 회사를 그만 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근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를 과장님이라고 불러주는게 싫지는 않았던 적도 많다. 가끔 그 시절이 떠올라 꺼내보고 싶을 때도 있다. 명함 하나로, 꾸며진 사회적 지위 하나만으로 당당함 같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던 그 때. 한국 사회에서 이런 특권의식 비슷한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그렇게 또 살아가겠죠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있느냐보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이고 어떤 직책을 가지고 있는지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해주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 하지만 세상에서 영원한 내 것은 없거늘 왜 다들 그렇게 높은 자리에서 인정받고 싶어하며 스스로를 과장하며 살아가는 것인지. 우리는 모두가 진짜 자신의 모습을 숨기며 사는건 아닐까.


과장으로 과장하지 않도록 그런걸 좀 깰 수 있는 일을 하며 사는 것이 나의 꿈이다.

'나'라는 사람을 '무슨 일 하는 아무개'로 소개하는게 아니라, 러시아를 좋아하고 이와 관련된 것들을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행복으로 살고 싶은 그런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내가 아는 것이 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늘 겸손한 마음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사람이고 싶다.


'운명의 아이러니' 영화에서처럼 나는 무언가에 홀려서 회사를 박차고 나와 험한 세상에 떨어진게 지금 현실이지만, 결국은 운명적인 무언가와 맞닥뜨리게 되었으면 좋겠고 또 그럴 것이라 믿는다. 

그것은 분명 러시아와 관련된 모험일테지?! 그래, 나는 모험소녀니까. 

사람 일은 정말 알 수 없는거다.


나의 시베리아 횡단열차 여행은 언제쯤 이어지려나.



★ 게재한 모든 사진들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Copyright by 모험소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