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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Feb 24. 2023

러시아가 겨울과 이별하는 법

민간신앙 의식과 정교회가 만난 모두의 축제 마슬레니짜

봄을 기다리며


3월을 앞둔 요즘, 추위가 차츰 누그러들고 있다.


1년의 절반이 겨울인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춥고 눈이 쌓여있어도, 지금이 어느때보다 따사로운 햇살과 푸르른 잎사귀가 기다려지는 시점일 것이다.

본격적인 러시아의 봄은 5월부터지만, 봄맞이 준비 운동은 이맘때부터 이미 시작되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길고 추웠던 겨울과 과감하게 이별하고 봄을 맞기 위해  해마다 '마슬레니짜 Масленица' 축제를 기념한다.

많은 이들에게는 러시아식 팬케이크 '블리니 блины(블린)'를 먹는 날로 기억되기도 한다.

마슬레니짜 블리니(출처: yur-gazeta.ru)


러시아 현지 여론조사에 따르면,

전 국민의 53%가 이 축제의 전통을 지킨다는데,

이는 새맞이 트리를 장식하는 것 다음으로 높은 참여율이라 한다.


러시아 사람들이 겨울과의 이별에 이토록 진심일 줄이야!

도대체 어떤 축제이길래 그런 걸까?




(1) 정교회가 품은 전통 의식


지금은 봄맞이 축제로 널리 알려 '마슬레니짜'.


이는 원래 고대 루시정교회를 받아들이기 이전, 봄이 겨울을 정복하도록 돕는 동슬라브인의 민간신앙 의식(코모에지짜 Комоедица)에서 비롯됐다.  슬라브인은 춘분 무렵 봄의 태양 신을 기리려 둥근 팬케이크를 만들고 첫 조각은 곰에게 바치는가 하면, 불꽃 위를 널뛰며 허수아비를 태우는 등의 의식을 행했다.


마슬레니짜 현장(출처: almode.ru)


러한 의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그 모습과 의미에 조금 변화가 생겼다.


이어져 내려온 전통은 정교회가 뿌리내린 후로도 여전히 러시아 민중 속에 강하게 남아있어, 근절하기 쉽지 않았다.

그래서 정교회에서 큰 결단을 내렸다. 심하면 방탕해 보이기까지 해 종교적 성격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6세기 이 민간신앙 의식을 재해석하여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단, '마슬레니짜'라 명명게 된 이 절기는 놀고 먹는 의식 탓에 기독교 절기 중 정결한 몸과 마음으로 금식하는 사순절(부활절 이전 40일) 직전 마지막주로 지정되었다.


정교회에서 지키는 마슬레니짜, 이 주간은 우유와 기름이 든 블리니를 먹을 수 있다.(출처: ok.ru)


이제는 원래 민간신앙 의식보다는,

정교회 신자들이 사순절 금식에 들어가기 전 한 주 블리니를 먹으며 쉬어가는 시기로 탈바꿈했다.

이처럼 마슬레니짜가 정교회와 맞물려 지키는 절기가 되면서, 매년 축제 기간도 다르다.

율리우스력을 지키는 러시아 정교회 절기에 따라 마슬레니짜 주간 정해지는 것이다. 보통 2월 말에서 3월 초 즈음이면 어김없이 찾아온다.


2023년에는 2월 27일부터 4월 15일까지가 정교회 사순절 기간으로,

그 직전 주에 해당되는 2월 20일부터 26일까지 한 주 동안 마슬레니짜를 기념한다.


물론 대중적으로는 겨울을 보내고 봄을 맞이한다는 의미는 여전히 남아있어,

많은 이들이 다양한 이벤트를 통해 축제 그 자체를 즐기게 되었다.

 

(2) 먹고, 놀고, 불태우는 주간


마슬레니짜 주간은 얇은 러시아식 팬케이크 블리니를 먹는 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블리니. 마슬레니짜에는 무조건 풍성해야 하는 음식(출처: bel.cultreg.ru)

마슬레니짜 대표 음식 블리니는

그 모양처럼 둥근 태양을 상징하며, 이웃들과 함께 풍성하게 나누어 먹기 위해 무조건 많이 준비해 놓아야 미덕인 음식이다.

마슬레니짜 주에는 육류는 멀리하는 대신 유제품은 맘껏 먹을 수 있으니, 고대 시절부터 해먹던 우유와 기름이 들어 블리니는 빠질 수 없게 됐다. 축제 명칭도 블리니 구울 때 필요한 '기름, 버터(масло 마슬로)'에서 왔다는 설도 있다.


마슬레니짜 주간에는 전통적으로 다양한 놀이를 해왔다.

 덮인 언덕에서 마차와 썰매를 타고, 젊은 남성은 맨주먹 싸움을 하거나 눈으로 성을 쌓아 서로 빼앗기도 한다. 또 신혼부부를 포함한 젊은 남녀가 노래를 부르 춤을 추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마슬레니짜를 즐기는 사람들(출처: almode.ru)
손잡고 도는 마슬레니짜 춤 호로보드(출처: novyefoto.ru)
마슬레니짜의 놀이(출처: www.rbc.ru)


마슬레니짜는 7일 간 이어지는데, 큰 축제(Широкая масленица)는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다.

요일마다 고유의 주제가 있다. 이는 주로 결혼 적령기 남녀의 어울림, 장모의 신랑 대접, 신부의 시누이 초대 등 유쾌하게 교류하는 시간들로 이루어져, 잘 연결되면 남녀가 결혼을 약속하는 자리로 이어지곤 했다. 그러한 자리에 음식 대접의 윤활유가 되어주는 것이 바로 블리니였다.


마슬레니짜 모습(출처: almode.ru)


축제의 절정은 마지막 날(일요일)이다.

축제와 같은 이름을 한 거대한 볏집 허수아비 '마슬레니짜'강렬하게 환송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첫 날 썰매 타고 대중들과 만난 예쁜 옷 입 마슬레니짜 축제 마지막 날 시원스럽게 태워진다.


특별히 이 날은 '용서의 일요일'로,

서로서로 용서하고 용서 받는 날이기도 하다.


2017년 모스크바의 마슬레니짜 태우기(출처: almode.ru)


이처럼 마음껏 먹고, 힘껏 놀면서 겨울과 헤어지고, 다가올 봄을 맞이하며 사순절을 준비하는 기간.

마슬레니짜는 한마디로는 단언하기 어려운, 꽤 다양한 의미를 지닌 절기인 것이다.


지금은 해마다 모스크바 근교 넓은 공터에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축제 전통 놀이를 함께 제대로 즐기는 '박솁스카야 마슬레니짜(Бакшевская масленица)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았다. 캐주얼하고 상업적이지 않은 행사라 모두가 진심으로 열정적이고 즐겁다.


한편 도시에서의 요즘 마슬레니짜는 축제 전통보다

알찬 프로그램과 함께 온국민이 즐기는 날이 되었다.

물론 누구에게나 블리니를 먹는 봄맞이 축제로 더 널리 각인되어 있기는 하겠지만 말이다.


(3) 작품에서 전해지는 축제의 기운


왁자지껄 마슬레니짜 풍경을 아마도 우리는 이미 각종 작품을 통해 간접적으로 경험한 바 있을 것이다.


2000년 국내  영화 <러브 오브 시베리아>에서

여주인공 제인과 라들로프 장군이 방문한 떠들썩하고 즐거운 축제의 현장이 바로 마슬레니짜다.

블리니와 보드카, 사나이들 맨주먹 싸움, 허수아비 태움, 용서 구하는 모습까지,

영화 속에서 축제의 많은 장면을 만나볼 수 있다.


<러브 오브 시베리아> 블린을 먹는 제인
맨주먹 싸움과 허수아비 태우기
용서를 구하는 라들로프 장군


러시아 명화 속에서도 마슬레니짜의 분위기가 잘 전달된다.


보리스 쿠스토디예프의 <마슬레니짜>를 보면 눈 덮인 언덕 위 마차 타는 모습과

축제를 즐기려는 민중들이 삼삼오오 모여있는 풍경이 동화 같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설레고,


보리스 쿠스토디예프, <마슬레니짜>, 1916년
보리스 쿠스토디예프, <마슬레니짜>, 1920년


바실리 수리코프의 <눈마을 점령> 속

생동감 넘치는 눈마을 쟁탈전에서 젊은 사람들의 용맹한 모습과 한껏 들떠있는 민중들의 마슬레니짜의 에너지가 느껴지며,


바실리 수리코프, <눈마을 점령>, 1891년


콘스탄틴 마콥스키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성 광장의 마슬레니짜 민중 놀이>에는

인형극과 연극에 주목하고 있는 수많은 대중, 그리고 연기 모락모락 먹거리까지 축제의 모든 기분이 응집되어 있다.


 콘스탄틴 마콥스키, <상트페테르부르크 해군성 광장의 마슬레니짜 민중 놀이>, 1869년


작품만 봐도 그야말로 흥청망청 놀고 먹어도 괜찮은 그런 마슬레니짜인 것 같다.




마슬레니짜는 이처럼 종교적으로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잠시 약간의 방탕함이 허용되는 일주일,

일상에서는 따뜻한 봄을 기다리며 팬케이크로 기름칠하는 일주일이다.


러시아와 같은 동슬라브계인 우크라이나에서도 이 축제를 '슬랴나 Масляна' 또는 '마스니짜 Масница'라는 이름으로 기념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치즈가 든 만두 바레니키(вареники)를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서로 같은 축제를 기념하는 양국인데,

이들의 화합과 평화는 과연 언제쯤 도래할까?


모두가 어서 이 기나긴 겨울과 이별했으면 좋겠다.



※ 원문 관련 영상 [러시아의 겨울과 헤어질 결심]

출처: 유튜브 채널 여행과 사색



* 커버 사진: 보리스 쿠스토디예프, <마슬레니짜 썰매 타기>,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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