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험소녀 May 08. 2024

톨스토이와 차이콥스키, 모스크바에 살아 숨 쉬는 예술혼

모스크바 문화예술 인물과 명소 기행

'러시아'하면 문학과 음악이 빠지면 안 되겠다.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의 관중들(출처: ria.ru)


러시아인은 어릴 때부터 관련 교육을 받고 문화 생활도 일상이 되어, 읽고 듣고 감상하는 예술이 자연스럽다. 이들에게 예술은 특정인들만 향유하는 대상이 아니다. 누구나 양질의 공연을 비싼 돈 들이지 않고 감상할 수 있고, 예술가에 대한 박물관 구성도 다채롭고 깊이 있고 생생하며 늘 열려 있어 진입 장벽이 낮은 편이다.

러시아가 문화예술 강국이 된 비결이기도 하다.


러시아 사람들의 일상 속 독서(출처: trip-for-the-soul.ru)


러시아에서 수많은 예술가가 탄생했지만 한국에서 알려진 이들은 대부분 19세기 인물이다.

그중에서도 오늘 글에서는 모스크바와 인근에서 활동한 문학가와 작곡가를 알아보고, 관련 장소에 방문하고자 한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인물들이라 간략하게 짚어본다.


주인공은 두 사람이다.

항상 철학적 질문과 종교적 해답을 담아 소설의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레프 톨스토이,

그리고 유럽의 음악을 러시아식으로 멋지게 해석해 창조해 낸 표트르 차이콥스키이다.



(1) 레프 톨스토이 Лев Н. Толстой(1828~1910)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제목이 주는 질문 자체가 철학적이라, 답을 얻고자 손이 가는 그의 문학에는 '선함'이 느껴진다. 무슨 배경으로 레프 톨스토이는 이같은 생각들을 문학에 담아내게 되었을까? 그의 일생을 좇아가 본다.


일리야 레핀이 그린 레프 톨스토이 초상화(1887년 作)(출처: dzen.ru)


긴 흰 수염에 심오한 표정이 낯익은 문학가이자 사상가 레프 톨스토이는 1828년 모스크바 인근의 툴라(Тула) 지방 야스나야 폴랴나(Ясная Поляна) 영지의 백작 가문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콜라이는 1812년 조국 전쟁에 참전한 장교 출신이었고, 어머니 마리야는 볼콘스키 귀족 가문 출신이었다. 하지만 부모는 톨스토이가 어릴 적 세상을 떠났고, 그와 형제들은 친척들 손에서 길러졌다. 특별히 그는 아버지쪽 친척들 영향을 많이 받아, 후에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캐릭터의 원형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군 장교 시절의 톨스토이(출처: ar.culture.ru)


톨스토이는 1944년 카잔 대학교 동양학부(터키-타타르어)에 입학했지만 낙제해 법대로 편입했다. 하지만 결국 학업 문제가 풀리지 않자, 1847년 대학을 관두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대신 그는 사교 행사에 참석하며 카드 놀이를 즐겼고 자기가 좋아하는 철학과 언어를 연구하며 한가로이 생활했다. 이후 그는 1851년 코카서스로 떠나 포병대 입대해 크림 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참전하면서 첫 작품 『유년시절』을 1852년 '현대인(Современник)' 잡지에 발표했다. 전쟁에서 받은 영감으로『세바스토폴 이야기』,『코사크』등을 출간하면서 그는 작가로서 지위를 탄탄히 했다. 아무래도 톨스토이는 대학 공부보다 군 복무가 적격이었던 모양이다.


야스나야 폴랴나에 있는 톨스토이 학교와 학생들(출처: visualrian.ru)


1856년 중위로 전역한 톨스토이는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러시아 농노 해방(1861) 전 교육에 관심을 보이며 농민을 위한 학교를 20개 넘게 설립하는 등 고향 툴라 지역 농민 교육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약자를 돕는 일에 아낌이 없었던 그는 1862년 소피야 베르스와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새로운 작품들도 계속 남겼다. 소설『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등이 결혼 이후 탄생한 걸작들이다. 그는 소피아와 슬하에 열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


톨스토이와 그의 부인 소피야 베르스 젊은 시절과 그 이후(출처: novayagazeta.ru, tolstoymuseum.ru)


톨스토이는 1890년대에 소설『부활』을 남겨 이를 통해 국가와 교회, 기존 사회 질서를 비판하기도 했다. 그와 더불어, 그는 평생 종교적, 도덕적으로 깊고 복잡한 질문에 빠져 살았다. 자신의 신념을 실천하고자 옷은 늘 단출하게 입었고 채식주의자가 되었으며 육체적으로 노동했다. 그는 사회 변화에 초점을 두고 철학적으로 사유하며 교회의 교리에 반대하는 한편 기독교의 근본 사랑을 가르쳤고, 당시 민중들도 그의 사상을 따르며 추앙했다. 이러한 톨스토이주의가 확산되자 이는 귀족들과 교회 관계자들의 미움을 샀고, 급기야 러시아 정교에서는 1901년 그를 파문하기에 이른다.


이후 농민 같은 삶을 살던 그는 집을 떠나 병에 걸려 사망했다. 야스나야 폴랴나에 그의 무덤은 화려함도, 눈에 띔도 없이 변변한 비석조차 없어 초라할 정도다. 이처럼 무덤만으로도 작가가 살다 간, 그리고 그가 추구했던 삶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톨스토이의 작품이 9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고 노벨상 후보에도 여러 번 오를 만큼, 그의 작품에 담긴 뜻은 세대를 거듭해도 지워지지 않고 있다.


야스나야 폴랴나 영지의 톨스토이가 살았던 저택. 현재 박물관(출처: stranabolgariya.ru)
야스나야 폴랴나 톨스토이의 묘지(출처: flectone.ru)


지금부터는 모스크바에서의 레프 톨스토이의 발자취와 그의 작품까지 느낄 수 있는

하모브니키 톨스토이 저택 박물관과 프레치스첸카 톨스토이 박물관·문학관,

그리고 톨스토이 센터, 이렇게 세 장소를 둘러보려 한다.



[톨스토이 저택 박물관 Музей-усадьба Л. Н. Толстого в Хамовниках]


모스크바 하모브니키에 있는 톨스토이 저택 박물관(출처: tolstoymuseum.ru)


박물관은 옛 방직공 마을이던 하모브니키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저택이다. 이곳은 레프 톨스토이가 1882년부터 1901년까지 부인과 열 명의 아이와 함께 살았던 곳으로 규모가 꽤 크다. 여름은 모스크바 남부 약 200km 떨어진 야스나야 폴랴나에 내려가서 보내고, 하모브니키 저택에서는 열아홉 번의 겨울을 보냈다. 톨스토이는 이곳에서 소설 『부활』,『이반 일리치의 죽음』,『크로이체르 소나타』 등 100여 개 작품을 남겼다.


톨스토이가 작품 활동을 하던 공간(출처: tolstoymuseum.ru)


저택 박물관 16개의 방 각각의 공간에는 작가와 가족들의 오랜 물건과 가구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명작이 탄생한 톨스토이의 서재, 라흐마니노프와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음악을 연주했던 홀, 아내 소피야 취향에 맞춘 동양 스타일의 붉은 접견실, 채식주의자인 톨스토이가 식사하던 식당, 부부 침실, 아이들 방 등 층을 오가며 둘러볼 곳들이 많다. 톨스토이가 즐겨 타던 자전거, 그가 치던 그랜드 피아노, 계단에 있는 박제 곰, 초상화 등 6천여 개가 넘는 전시품 하나하나가 특별하다. 톨스토이의 저택은 국유화되고 복원된 후 1921년 박물관으로 개관했다. 보리수와 단풍나무 가득해 아름다운 바깥 정원은 톨스토이가 집 구입을 결정하는데 크게 작용한 포인트라고 하니 편안히 쉬었다 가도 좋겠다.


톨스토이 저택 박물관 내부. 거실 등 손님 맞이 공간(출처: ru.m.wikipedia.org, liveinmsk.ru)
아이들의 방과 식당(출처: liveinmsk.ru,  kudamoscow.ru)


덧붙여 저택에서 레프 톨스토이 거리를 따라 올라가면 제비치 폴레 공원(сквер Девичьего поля)이 있다. 이곳은 톨스토이가 자주 방문해 공연을 감상하고, 아이들에게 군것질 거리를 사주고, 서민들과 이야기 나누던 장소이다. 본래는 톨스토이 박물관·문학관 마당에 있던 그의 동상이 작가 탄생 144주년 되던 1972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위엄 있게 앉아 있는 긴 수염의 톨스토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모습이다.


저택 박물관 부근 제비치 폴레 공원에 있는 톨스토이 동상(출처: trip-for-the-soul.ru)
< 톨스토이 저택 박물관 >
- 주소 : ул. Льва Толстого, 21(레프 톨스토이 거리)
- 찾아가기 : 메트로 1∙5호선 Парк культуры(파르크 쿨투리)역에서 도보 8~9분


[국립 톨스토이 박물관·문학관 Государственный музей Л.Н. Толстого (ГМТ). Литературная экспозиция на Пречистенке]


톨스토이 박물관. 문학관(출처: happy-galla.ru)


프레치스첸카 거리의 톨스토이 문학 박물관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삶과 작품에 대해 알아갈 수 있는 박물관이자 문학관으로 많은 이들이 찾는다. 1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에서는 '레프 톨스토이와 그의 시대', '레프 톨스토이의 땅과 하늘' 등 톨스토이 관련 주요 테마들로 상설 전시를 꾸며왔다. 이곳 전시장에서는 레프 톨스토이가 자필로 쓴 원고, 작품에 들어간 삽화 컬렉션, 레핀이나 게 등 당대 유명 화가가 그린 톨스토이 초상화, 가족 사진 등도 만날 수 있다. 또 아내와의 결혼 용품, 소설을 쓰기 위해 아내에게 준 반지 등 작가의 가족과 삶, 작품의 주요 순간을 만나는 전시도 있다. 그밖에 내부 큰 홀에서 다양한 문화 행사들이 진행되기도 한다.


톨스토이 박물관·문학관 전시장 내부(출처: yourmoscow.ru, bangkokbook.ru)
톨스토이 박물관·문학관 전시품들. 삽화와 원고 등(출처: tourister.ru)


특별히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은 19세기 건축 기념물로서 6개 기둥을 가진 제국 스타일로 1817년 지어졌다. 보기에는 석조 건물 같지만, 벽과 천정, 구조물이 나무로 만들어져 회반죽을 덮은 것이다. 당시 박물관 기획자 불가코프는 이 건물을 보고는 톨스토이 박물관으로 적격의 공간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그렇게 1920년부터 그의 공간으로 탄생했다.

< 국립 톨스토이 박물관·문학관 >
- 주소 : ул. Пречистенка, 11/8(프레치스첸카 거리)
- 찾아가기 : 메트로 1호선 Кропоткинская(크로포스트킨스카야)역에서 도보 5분


[톨스토이 센터 Толстовский центр на Пятницкой]


톨스토이 센터(출처: zakomorny.com)


퍄트니츠카야 거리의 소설가 톨스토이를 이야기하는 박물관이다. 이 장소는 국립 톨스토이 박물관의 전시 홀처럼 사용하게 되면서 1985년 개관했다. 수년 간 다양한 박물관 컬렉션을 통해 '1850~1860년 모스크바의 톨스토이', '톨스토이 부인의 탄생 150주년 즈음에', '코카서스와 크림' 등 주제별로 전시를 지속 개최해왔다. 지금도 다양한 테마 전시와 콘서트, 문화 행사가 열리고 있다.


톨스토이 센터의 테마 전시 '전쟁과 평화' 특별 행사(출처: tolstoymuseum.ru)


센터 건물은 톨스토이의 젊은 시절의 짧은 기간을 기억하는 장소이다. 18세기 후기 건축 기념물로서 젊은 시절 톨스토이가 크림 전쟁에서 돌아와 이곳의 일부를 빌려 1857~1858년 이상을 지냈다. 그는 당시 여기서 『코사크』,『알베르트』,『세 죽음 』등 작품을 완성했고, 다른 작가들과 교류하며 주요 관계도 유지했다. 1858년 이 집에서 부활절을 보낸 느낌들은 40년 후 소설 『부활』 집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알려져 있다.


톨스토이 센터(출처: dzen.ru)
< 톨스토이 센터 >
- 주소 : ул. Пятницкая, 12(퍄트니츠카야 거리)
- 찾아가기 : 메트로 2호선 Новокузнецкая(노보쿠즈네츠카야), 6∙8호선 Третьяковская(트레치야콥스카야)역에서 도보 2~5분



(2) 표트르 차이콥스키 Пётр И. Чайковский(1840~1893)


살면서 그의 노래를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까?

제목까지는 잘 몰라도 TV 속 배경음악으로 많이 등장해 우리 귀에도 익숙한 차이콥스키의 음악은 러시아의 대표 음악과도 같은 느낌이다. 그의 이름이 표트르인 것까지는 모를지라도 그의 성 '차이콥스키'는 입에 자주 오르내리곤 한다.


표트르 차이콥스키(출처: photochronograph.ru)

표트르 차이콥스키는 1840년 캄스코-보트킨스크 제철소 인근 마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일리야는 엔지니어로 공장 관리자였고, 어머니 알렉산드라는 고위 세관원 딸로 피아니스트였다. 아무래도 차이콥스키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이후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해 그곳에서 제국 법학 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부모의 뜻대로 법을 전공했지만 학업 중에도 본인이 좋아하는 음악 공부에 꽤 진지하게 임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그는 전공에 따라 법무부에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음악에 미련이 남아 있어 일을 하면서 음악도 병행했다. 그는 1861년 러시아 음악협회에서 운영하는 음악반에 들어갔는데, 이 음악반은 1862년 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現 상트페테르부르크 림스키-코르사코프 콘서바토리) 설립 기반이 된다.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가족. 표트르는 맨 왼쪽(출처: mixfotos.ru)


결국 그는 23세에 법무부를 그만두고 상트페테르부르크 콘서바토리 학생으로서의 역할에 전념했다. 당시 그는 콘서바토리의 작곡반 첫 번째 학생이 되었다. 니콜라이 자렘바와 안톤 루빈시테인(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의 형)이 그의 담당 교수였다. 물론 주변 가족들은 그의 작곡 활동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차이콥스키는 1865년 수상까지 하면서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1866년부터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모스크바로 이주해 현재의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에서 1878년까지 교사로 재직하면서 매년 90명의 학생을 가르쳤다. 그는 교육과 동시에 피아노 교향곡, 오페라 작곡하는 등 창작 활동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하지만 탄탄대로가 이어지기보다는, 재정난에 시달렸고 그가 작곡한 작품들에 대한 비평가들의 비난도 이어졌다. 거기에 굴하지 않고 작곡을 이어간 덕분에 발레 음악 「백조의 호수(1876)」나 서곡1812년(1880)과도 같은 걸출한 명작들이 탄생했다. 안타깝게도 그의 결혼은 순탄하지 않았다.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의 제자였던 밀류코바와 1877년 결혼했으나 짧은 결혼 생활을 끝으로 헤어지게 된다.


1874년의 차이콥스키와 콘서바토리에서 재직한 차이콥스키(출처: ria.ru)


이후 차이콥스키 후원을 희망하는 미망인 메크 부인을 만났고, 그는 음악에만 집중하고 싶어 콘서바토리를 사임하고 몇 년 간 유럽을 다니며 작곡했다. 이후 러시아에서도 유명세를 탄 그는 러시아 음악협회 이사회 회원이 되고, 모스크바 지부를 이끌었다. 그리고 모스크바 근교의 클린 마을 근처의 저택에 자리를 잡고 자연과 은둔하며 발레 음악「잠자는 숲속의 미녀,「호두까기 인형, 오페라「스페이드의 여왕, 교향곡 등 유명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1887년 이후 그는 첫 해외 콘서트를 떠나 자기 작품을 연주하여 세계적으로도 인정 받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경험을 통해 유럽의 음악에 러시아적 감성을 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높아지는 명성과는 반대로 그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1893년 차이콥스키는 콜레라에 걸려 5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 치흐빈 묘지에서 그를 만날 수 있다.


자연 속 차이콥스키와 차이콥스키의 묘지(출처: ria.ru, mixyfotos.ru)


물론 차이콥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묻혀있지만 그의 예술혼은 모스크바에 있을 때 가장 상승 곡선을 탔다. 이를 확인하고 기념할 수 있는 모스크바의 장소들을 찾아가보기로 한다.

바로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콘서바토리와 차이콥스키 박물관, 그리고 차이콥스키 콘서트 홀이다.


그의 음악 중 피아노 교향곡 1번을 조성진의 연주와 함께 들으며 산책해 보자.

출처: 유튜브 채널 Cho Rabbit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콘서바토리 Московская государственная консерватория имени П.И. Чайковского]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콘서바토리(출처: dzen.ru)


발샤야 니키츠카야 거리에서 앉아 있는 표트르 차이콥스키 동상을 찾아보자. 동상 뒤로는 유수한 음악인을 배출한 모스크바 콘서바토리(음악원) 건물이 있다. 특히 이곳의 볼쇼이 홀은 좌석 1,737개 규모로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나 각종 대회가 열리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공연장이다. 유명 음악가들의 초상화로 둘러싸인 극장에서는 클래식의 전통을 느낄 수 있고, 악기들이 합을 이루는 연주를 감상할 때면 온몸에 전율이 일어나고 심금을 울리는 음향의 짜릿한 감동이 있다.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특권이다.


모스크바 콘서바토리 앞에 있는 차이콥스키 동상(출처: wi-fi.ru)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콘서바토리 볼쇼이 홀 내부(출처: culture.ru, choirsofmoscow.ru)


모스크바 콘서바토리는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인 니콜라이 루빈시테인(1835~1881)의 주도 하에 1866년 설립됐다. 당시 그의 나이는 불과 25세였고, 그가 초대 교장을 지냈다. 니콜라이는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을 콘서바토리에 초빙하여 학생들에게 수업을 지도하도록 시스템을 마련했다. 그중 한 명이 바로 차이콥스키였고,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은 그의 작품을 널리 알리는데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콘서바토리를 빛나게 해준 차이콥스키의 이름이 이곳에 붙게 된 건 1940년부터이다. 그의 은인이기도 한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을 만나볼 수 있는 박물관은 음악원 건물 안에 있다.


콘서바토리의 니콜라이 루빈시테인 박물관(출처: mosconsv.ru)
<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콘서바토리 >
- 주소 : ул. Большая Никитская, 13(발샤야 니키츠카야 거리)
- 찾아가기 : 메트로 1호선 Библиотека им. Ленина(비블리아체카 이메니 레니나)역에서 도보 10분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박물관 Музей П.И. Чайковского в Москве]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박물관(출처: Яндекс Карты)


모스크바 도심 북동부에 위치한 차이콥스키의 박물관이다. 작곡가가 1872년 9월부터 1873년 11월까지 이곳에서 살았다고 전해진다. 그가 거주한 모스크바의 집들 중 유일하게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차이콥스키는 모스크바에서 놀라운 음악적인 재능을 펼쳤다. 그는 '운명이 나를 12년 넘게 산 모스크바로 내몰지 않았다면 내가 할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밝힐 정도로 모스크바는 그에게 음악적으로 큰 영향을 준 도시이기도 하다다. 그는 이 건물 2층에 살면서 교향곡 2번, 환상곡「템페스트」등을 작곡했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박물관 전시품들(출처: musicalmoscow.ru, bangkokbook.ru)


박물관에는 차이콥스키의 물건, 편지와 초상화, 악보와 작품 에디션 등이 전시되어 있으며, 그가 남긴 말들도 곳곳에 적혀있다. 전시장에서는 그와 동시대를 살아간 사람들, 그의 동료와 친구, 가족 사진과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만나게 된다. 아울러 음악인 박물관답게 두 개의 크고 작은 홀이 있어, 그곳에서 실내악 연주회가 열린다. 차이콥스키의 박물관은 오랜 시간 복원을 거쳐 2007년 5월 18일 개관했다. 현재는 러시아 국립 음악 박물관 분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박물관 내 그를 느낄 수 있는 공간들(출처: countryscanner.ru)
< 모스크바 차이콥스키 박물관 >
- 주소 : Кудринская пл., 46/54(쿠드린스카야 광장)
- 찾아가기 : 메트로 7호선 Баррикадная(바리카드나야)역에서 도보 7분


[차이콥스키 콘서트 홀 Концертный зал имени П.И. Чайковского]


차이콥스키 콘서트 홀(출처: yandex.ru)


마야콥스카야 메트로역 광장에 위치한 공연장으로, 모스크바 필하모니의 주요 활동 무대이다. 크고 멋진 외관만큼이나 이곳에서 훌륭한 러시아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장엄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할 수 있다. 차이콥스키 콘서트 홀은 고대 그리스 극장 모습을 본따 반원형 계단식 관람석 형태로 1천 500개 좌석 규모를 갖춰 국내에서도 큰 규모를 자랑한다. 매년 300여 개 공연이 열리고 40만 관람객이 찾아올 정도로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심지어 대조국 전쟁 기간 동안에는 무려 1천개 이상의 공연이 계속됐다고 한다.


차이콥스키 콘서트 홀의 웅장한 내부(출처: rg.ru)


차이콥스키 콘서트 홀은 사실 차이콥스키가 방문했거나 살았던 곳은 아니다. 단지, 작곡가 차이콥스키 탄생 100주년 되던 1940년 개관한 이곳에 그의 이름을 붙였다. 관리는 모스크바 필하모니에서 했다. 이곳에는 1840년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성당에 있던, 예전에 차이콥스키가 연주한 적 있는 19세기 독일 오르간이 설치되기로 했으나 분해하고 모스크바로 가져오는 과정에서 꽤 손상되었다. 이후 파이프 오르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1959년에는 콘서트 홀에 체코슬로바키아 리거-클로스 오르간이 새롭게 등장했다. 무려 3개층, 8m 높이에 7,800개 소리관을 가진 것만 봐도 그 엄청나게 울림이 있는 음향을 가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이곳에서 클래식 연주를 감상하고 올 충분한 가치가 있다.


차이콥스키 콘서트 홀의 파이프 오르간(출처: stranabolgariya.ru)
< 차이콥스키 콘서트 홀 >
- 주소 : Триумфальная пл., 4(트리움팔나야 광장)
- 찾아가기 : 메트로 2호선 Маяковская(마야콥스카야)역에서 도보 1분




이처럼 모스크바의 추억처럼

때로는 우리가 읽고 듣는 작품에, 때로는 사후 업적을 기리고자 건물에 남은 예술가들의 흔적들을 통해 우리는 알게 된다. 예술은 만들어진 당시만이 아니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무형의 보물임을 말이다.


레프 톨스토이의 작품, 표트르 차이콥스키의 작품들(출처: culture.ru, dzen.ru)


특별히 모스크바 중심으로 조명된 톨스토이와 차이콥스키의 삶, 그리고 그들 인생의 선택들이 지금 우리에게 큰 파장으로 전달되고 있는 걸 보면, 도대체 이 도시에 어떤 예술혼이 깃들어 있기에 그런 마법이 일어났는지 궁금증을 자극한다.


다음에는 꼭 가서 그 의문을 풀고 오고 싶다.



* 커버 사진 출처: izi.travel, flectone.ru


★ 연재물 내 출처가 명시된 사진을 제외한 본문의 모든 텍스트 및 내용 구성에 대한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습니다:) Copyright by 모험소녀 ★


이전 07화 혁명, 그리고 대조국 전쟁 속 참혹했던 900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