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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May 01. 2024

혁명, 그리고 대조국 전쟁 속 참혹했던 900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만난 러시아 격동의 역사

'상트페테르부르크' 하면 러시아 제국이 이룩한 찬란한 유산들만 떠올릴 것 같다.


하지만 러시아는 같은 시기 당시 유럽보다 모든 면에서 뒤쳐져 있었고, 체제들은 이미 낡은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제국의 영광 그 이면에는 힘겹게 생존을 다투며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넘쳐났고,

이에 변화가 필요하다 생각한 이들이 함께 뜻을 모아서 혁명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아름다움의 이면에는 아픔도 있다(출처: respekt-travel.ru)


그 결과 소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을 이루게 되었지만

국제 정세 힘겨루기 전쟁과 희생은 불가피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소련은 독일과의 힘겨운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절대로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환경 가운데 절박하게 버티고 견뎌낸 끝에 소련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전국적으로 힘겹고 고달픈 시간이었겠지만

특히 혁명과 전쟁, 이 모든 중요한 사건들을 온몸으로 겪어낸 장소가 바로 상트페테르부르크였다.

지금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현장의 혁명과 전쟁 속으로 들어가 본다.


전쟁이 도시에 남긴 상처(출처: redeveloper.ru)


(1) 꺼질 줄 모르는 혁명의 불씨


데카브리스트 반란(1825)

러시아가 자랑스러워하는 역사, 1812년 조국 전쟁 때의 일이다.

전쟁에 승리를 거둔 러시아군은 후퇴하는 나폴레옹군을 추격하여 1814년 파리까지 입성했다. 파리에 간 러시아 청년 장교들은 혁명을 겪은 프랑스에서 그들의 자유주의 사상과 선진 문물을 접하며 큰 충격에 빠지고 만다. 프랑스에 비해 당시 러시아는 농노제, 전제정치 등 당면한 제도와 현실이 무척 후진적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에 러시아로 복귀한 청년 귀족들, 그중 근위대 장교들은 현 제도에 대항하는 비밀결사단을 조직했고, 1825년 12월 러시아 최고기관 세나트 옆 광장에서 니콜라이 1세 황제 공식 임명 선포가 있는 날에 반란을 계획했다. 하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판도 제대로 벌여보지 못하고 거사에 가담한 장교들은 사형 또는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반란의 시기가 12월이라 향후 이들을 '데카브리스트'라 부르데 되었다. 비록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 데카브리스트 반란은 나라의 발전을 갈망했던 이들의 러시아 최초의 혁명 운동으로 평가된다.


바실리 팀의 그림 '세나트 광장의 데카브리스트'(1850년 作)(출처: ru.wikipedia.org)


피의 일요일(1905)과 러시아 혁명(1917)

이후 20세기에는 더 큰 혁명이 일어났다. 1904년 러일 전쟁에 패배한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대우와 상황이 열악해져 파업과 시위가 빈번했다. 나라 사정도 안팎으로 좋지 않았기에 이들은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이에 1905년 1월 9일 정교회 사제 가폰을 선두로 수만 명의 노동자가 니콜라이 2세에 청원하고자 궁전 광장에 모여들었다. 하지만 이를 경청하기는커녕 무장한 황제의 군대들이 시민들을 조준 사격했고, 1천 명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참사가 '피의 일요일'이다.


끔찍한 '피의 일요일' 사건(출처: kulturamgo.ru)


이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이미 재정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어려운 상황 속에 니콜라이 2세는 전쟁을 무리하게 진행시켰고, 전쟁이 절정이던 1917년 혁명이 일어난다.

세계대전의 폐해로 러시아가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1917년 2월 시민들은 시위를, 노동자들은 총파업을 일으켰고, 이를 제지하던 병사들도 함께 가담해 니콜라이 2세를 퇴위시켰다. 이후 멘셰비키 세력 중심의 임시정부가 탄생했지만 자리를 잡지 못했고, 결국 10월 레닌을 비롯한 볼셰비키와 소비에트의 무장 봉기로 혁명을 일으켜 겨울 궁전을 습격하고 장악했다. 이처럼 겨울 궁전은 황제 권력의 장소이기도 했지만, 혁명의 핵심 장소이기도 하다.


'자유, 평등, 박애' 1917년 2월 혁명의 풍경(출처: paris1814.com)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겨울 궁전 습격(출처: dzen.ru)


지금부터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혁명의 중심,

1825년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의 장소 네바 강변 데카브리스트 광장(세나트 광장)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중심 장소인 궁전 광장, 그리고 본격적으로 혁명을 공한 순양함 오로라호를 소개하려 한다.


[데카브리스트 광장(세나트 광장) Площадь Декабристов]

 

데카브리스트 광장 파노라마. 주변의 이삭 성당, 청동 기마상, 헌법재판소(출처: bangkokbook.ru)


표트르 대제 청동 기마상이 있는 광장으로 더 알려진 장소이다. 건축가 카를로 로시가 지은 러시아 제국 스타일의 정부기관 세나트(Сенат)가 옆에 위치해 '세나트 광장'으로 불렸는데, 지금은 세나트 건물에 러시아 연방 헌법재판소가 소재하고 있다. 사실 그보다 먼저 이곳에 자리를 잡은 표트르 대제의 청동 기마상이다. 동상은 1782년 프랑스 조각가 팔코네에 의해 세워졌다.


데카브리스트 반란이 일어난 당시 광장 풍경(출처: mydream.travel)


이후 표트르 대제 동상이 있는 이 광장에서 큰 사건이 일어났다. 프랑스 자유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청년 귀족 출신의 비밀결사 모임 데카브리스트들 주도로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 황제 계승에 반대하며 이곳에 병사들을 끌고 나와 반란의 불을 지핀 것이다. 그러나 황제의 군대에 진압 당해 실패로 돌아갔지만, 제국의 권력과 체제에 대항한 시도 자체는 러시아에서도 꽤 큰 의미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데카브리스트 반란 100주년을 맞이한 1925년부터 2008년까지는 이곳을 '데카브리스트 광장'이라 부르게 되었다. 알렉산드롭스키 정원 서쪽 끝에 위치한 이 광장은 네바강과 청동 기마상, 그리고 이삭 성당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더욱 아름답다. 혁명이 일어난 장소라고 믿기 힘들 정도!


데카브리스트 광장(출처: sportishka.com)
< 데카브리스트 광장(세나트 광장) >
- 주소 : Сенатская пл.(세나츠카야 플로샤지) 네바 강변 세나트 광장
- 찾아가기 : 메트로 5호선 Адмиралтейская(아드미랄체이스카야)역에서 도보 12분


[궁전 광장 Дворцовая площадь]


겨울 궁전과 궁전 광장(출처: ac.al-shell.ru, sportishka.com)


모스크바에 붉은 광장이 있다면, 상트페테르부르크에는 궁전 광장이 있다!

권력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도시의 중심이다. 수려한 겨울 궁전 건물과 웅장한 총참모부 건물, 바둑판 모양의 돌 바닥 위 천사가 서 있는 우뚝 솟은 알렉산드로프 기둥까지, 궁전 광장은 아름다운 건축물의 파노라마가 병풍처럼 감싸는 배경을 연출하고 있다. 한눈에 다 담지 못할 정도로 벅찬 이 궁전 광장에는 에르미타주 박물관이 위치하고, 총참모부의 아치문을 지나면 바로 넵스키 대로가 시작되어 뚜벅이 여행자가 상트페테르부르의 여정을 시작하기 좋은 랜드마크이다.


총참모부와 궁전 광장(출처: tvway.su)


궁전 광장은 제정 러시아 역사의 기념비적 장소이다.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 프란체스코 라스트렐리가 엘리자베타 여제의 명으로 18세기 겨울 궁전의 건축을 계획할 당시, 원래는 해군의 초원이던 이곳을 광장으로 만들었다. '광장'이라는 공간이 늘 그렇듯, 이곳에서도 참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궁전 광장에서 1905년 황제의 군대가 청원하러 온 노동자를 무참히 학살한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생했고, 1914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니콜라이 2세가 독일과의 전쟁을 선포했으며, 1917년 10월에는 전쟁으로 무너져가는 제국에 사회주의 혁명이 불꽃 같이 터졌다. 이처럼 나라의 주요 역사적인 사건의 중심 장소로서 그 당시의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각종 퍼레이드와 축제, 공연이 열리는 공간이 되어 많은 이들이 찾는 명소로 사랑받는다.


궁전 광장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사건(출처: dzen.ru)
혁명의 장소 궁전 광장(출처: carposting.ru)
< 궁전 광장 >
- 주소 : Дворцовая пл.(궁전 광장)
- 찾아가기 : 메트로 5호선 Адмиралтейская(아드미랄체이스카야)역에서 도보 7분


[순양함 오로라 Крейсер Аврора]


순양함 오로라(출처: puzzlefactory.com)


상트페테르부르크 페트롭스카야 해안로를 따라서 가다 보면 거대한 함대가 정박한 모습이 보인다. 그 주인공은 1900년 진수한 순양함 오로라인데, 이 함대는 러시아 역사에서 빛나게 활약했다. 러일 전쟁의 쓰시마 전투와 제1차 세계대전에도 참전했다. 무엇보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발발 시 붉은 깃발을 올린 오로라호가 쏘아 올린 대포는 혁명군의 겨울 궁전 습격 시작을 알리는 신호로서, 러시아 혁명의 상징으로 남았다.


러시아 혁명의 상징, 1917년 10월 오로라호의 발포(출처: yandex.net)


이후에도 오로라호는 대조국 전쟁에도 참전했다. 1956년에는 그 기념비적 지위로 인해 박물관으로 오픈하게 되었다. 2014년에는 인근의 크론슈타트로 옮겨져 수리되어 2016년부터 지금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 해군 박물관 지부로서, 근처 나히모프 해군 학교 생도들의 훈련 장소로도 사용된다고 한다.


순양함 오로라 박물관 내부(출처: dnevnikturista.ru, tourister.ru)
나히모프 해군 학교 생도들의 장소이기도 한 순양함 오로라(출처: smartik.ru)
< 순양함 오로라 >
- 주소 : Петроградская наб., 2-4(페트로파블롭스카야 나베레쥐나야) 페트로파블롭스크 강변로
- 찾아가기 : 메트로 2호선 Горьковская(고리콥스카야)역에서 도보 18분



(2) 900일을 버텨낸 레닌그라드 공방전


러시아 사람들이 '대(Great)'조국 전쟁으로 기억하는 시간은 힘들고 참혹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결전으로 기억되는 독일과 소련의 전쟁으로서 세계사에 큰 기록을 남겼으며, 우리나라 역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제2차 세계대전은 히틀러 나치군의 1939년 폴란드 침공으로 시작됐다. 이에 영국과 프랑스 중심으로 대항했고 전쟁은 6년 동안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었다.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소련의 스탈린은 독일의 불가침조약 제안을 받아들여 자국 이익을 챙기고자 하였으나 막상 전쟁이 일어나고 나니 상황이 달라졌다. 독일이 불가침조약을 어기고 1941년 소련을 침략한 것이다. 전쟁 초반에는 소련이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전선에 군수 물자와 인력을 조달 받고 서부의 주요 산업과 문화재는 동부로 이관하는 등 온 나라가 힘을 합쳤다.


대조국 전쟁(출처: mil.ru)


당시 가장 참혹했던 사건은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공방전이다. 1941년 9월 독일 나치군이 전략적으로 소련 레닌그라드의 육로와 해로를 모두 차단하고 도시를 완전히 포위했다. 하지만 당시 모스크바에 있던 스탈린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시민들이 직접 침략에 대항해야 했다. 매일 땅을 파고, 콘크리트 사격 진지를 만들고, 철조망을 설치했다. 또 독일군의 약탈을 막고자 당시 항공기, 탱크 제조 공장을 분해해서 노동자들과 함께 열차에 태워 우랄산맥 너머 시베리아로 이전했고, 각종 고서, 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품 100만 여점도 열차를 통해 예카테린부르크로 보냈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시민들이 힘을 합친 풍경(출처: samara.er.ru, waralbum.ru)
전쟁의 피해를 막고자 덮어버린 동상과 이삭 성당 앞 양배추 수확(출처: trip-for-the-soul.ru, vm.ru)


그뿐만이 아니다. 공습과 포격이 이어지자 시민들은 도시를 보호하려 동상은 땅에 묻고, 건물의 높은 탑은 계절색에 맞는 막을 덮거나 색을 칠해 위장했다. 무엇보다 식량 보급이 이루어지지 않아, 먹을 수 있는 건 닥치는 대로 찾아 먹어야 했다. 심지어는 벽지의 밀가루 풀을 떼 먹거나 책 접착제를 긁어서 수프를 만들고, 통나무 조각을 집어 먹기도 했다. 특히 여성은 전장에 나간 남성을 대신해 땅을 파고, 물을 나르고, 먹을 만한 것들을 만들어냈다. 정원과 광장에 양배추, 감자를 심어서 겨울을 대비하기도 했다. 다행히 추운 겨울 얼어붙은 라도가 호수 위 길을 통해 외부로부터 식량과 무기 보급로가 열렸고, 어린이, 노인, 여자들은 이를 따라 레닌그라드를 떠날 수도 있었다. 이처럼 참담했던 공방전은 정확히 872일 만인 1944년 1월 27일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미 레닌그라드 사람 600만 명 이상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한 후였다.


라도가 호수 위 피난길(출처: fullpicture.ru)


공방전 기간 중에도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레닌그라드 시민들을 독려하고자 7번 교향곡을 완성하고 전쟁 중에 연주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렇게 시민들은 서로가 힘이 되고 정신적 에너지를 전달한 덕분에 꽉 갇힌 도시에서 2년이 넘는 시간을 버틸 수 있었을 것이다.


치열했던 소련과 독일의 스탈린그라드 전투(출처: imghub.ru)


독일은 1942년 볼가강 연안의 스탈린그라드(現 볼고그라드)에서 격렬한 전투를 치른 후 기세가 꺾였다. 이때도 역시 나폴레옹처럼 추위 때문에 패전했다. 1945년 5월 8일 독일은 항복 문서에 서명했고, 서명 당시의 시간은 모스크바 기준으로 5월 9일이라 러시아에서는 이날을 전승 기념일로 지금까지 성대하게 축하하고 있다. 5월 9일이면 모두 승리를 기념하는 검정주황 리본(георгиевская ленточка)을 달며 희생자들을 기억한다.


현재 레닌그라 방어 및 봉쇄 박물관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쇼스타코비치 필하모니 볼쇼이 홀은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모습을 생생하게 담아내고 기억하는 장소이겠다.


대조국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소련(출처: duchovny.ru)
전승 기념일 축하(출처: work.vk.com)


[레닌그라드 방어 및 봉쇄 박물관 Музей обороны и блокады Ленинграда]


레닌그라드 방어 및 봉쇄 박물관(출처: radiometro.ru)


넵스키 대로 북부 폰탄카 강변에 레닌그라드 방어 및 봉쇄 박물관이 있다. 이곳은 독일과 소련의 전쟁 기간 중 벌어진 레닌그라드 공방전에서 도시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 생존 역사를 담은 박물관이다.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총 5만 5천여 개 전시품은 독일군이 1941년 9월부터 1944년 1월까지 약 900일 동안 도시를 봉쇄한 사건을 기억하고 기록하고 있다.


봉쇄 당시 정해진 양의 빵만 배급받을 수 있었다(출처: mixyfotos.ru)
당시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소지품들(출처: 3d-shka.livejournal.com)


봉쇄 당시 소련 시민의 아파트 일상을 비롯해, 빵 배식 풍경, 대피소와 장례 등 묘사된 생활 방식에서 일상 속 투쟁이 엿보인다. 또 소련과 독일의 군복, 총기, 탱크, 군사 지도 등 최전선의 아이템을 보면서 기나긴 저항의 현장도 그려볼 수 있다. 박물관은 봉쇄 해제 직후 개관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는데, 스탈린을 무시한 역사라는 이유로 1952년 문을 닫게 되기도 했었다. 이후 박물관은 1989년 재건되어 도시의 아픈 역사를 보듬어주고 깊게 되새기는 귀한 공간으로 자리잡았다.


공방전 투쟁이 담긴 그림과 무기(출처: telegra.ph)
< 레닌그라드 방어 및 봉쇄 박물관 >
- 주소 : Соляной пер., 9(솔랴노이 페레울록) 솔랴노이 골목
- 찾아가기 : 메트로 1호선 Чернышевская(체르니솁스카야)역에서 도보 17분


[상트페테르부르크 쇼스타코비치 필하모니 Санкт-Петербургская академическая филармония имени Д.Д. Шостаковича]


쇼스타코비치 필하모니(출처: omologenye-marina.ru)


넵스키 대로에서 루스키 박물관 가는 길목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쇼스타코비치 필하모니가 위치한다. 이곳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된 필하모니 중 하나이다. 건물은 1839년 건축가 카를로 로시가 지어서 고전주의 양식의 멋이 엿보인다. 음악 연주 감상에 아주 적격인 이곳의 볼쇼이 홀은 1,500석 규모를 자랑한다. 200여 년 간 바그너, 슈만, 차이콥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 세계적인 음악가들의 무대가 열린 장소이다.


쇼스타코비치 필하모니 볼쇼이 홀(출처: flectone.ru)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7번 교향곡을 완성하고 “레닌그라드 시민들을 위하여”라고 썼다. 그의 음악은 봉쇄 기간 중에도 이곳에서 연주되었다. 쇼스타코비치의 연주 속에는 꺼지지 않는 애국정신과 강인함, 마지막까지 싸우리라는 다짐이 깃들어 있었다. 1942년 8월 9일(공방전 355일째 되는 날) 레닌그라드 필하모니에서 전쟁으로 초토화된 도시에서 그의 '교향곡 제7번'이 초연됐다. 공연 중에는 독일군의 공격을 대비해 연주장을 방어했다고 한다. 그만큼 모두가 절실했고 거기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전쟁도 예술을 막을 수는 없다! 많은 레닌그라드 시민들에게 음악으로 용기와 희망을 준 장소라, 쇼스타코비치의 이름이 붙었다.


한편, 우리에게는 영화 등 배경음악으로 익숙한 쇼스타코비치의 왈츠 2번 곡이 가장 익숙하다.


레닌그라드 공방전 속에도 이어진 쇼스타코비치의 연주(출처 vk.com)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 7번이 초연된 1942년 8월 9일(출처: snob.ru)
< 상트페테르부르크 쇼스타코비치 필하모니 >
- 주소 : ул. Михайловская, 2/9(미하일롭스카야 거리)
- 찾아가기 : 메트로 2호선 Невский проспект(넵스키 프라스펙트), 3호선 Гостиный двор(가스치니 드보르)역에서 도보 3분




이처럼 격하게 힘들고 지난한 여정이었을 도시의 사건들,

상트페테르부르크가 가진 화려함 뒤에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의 영혼이 만들어낸 숭고함이 도시에 녹아 있어, 많은 문학 작품과 예술품이 탄생한 것인지도 모른다.


러시아 내부의 몸살과 외부로부터의 공격,

제정 러시아와 소련을 지내오기까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할이 컸고 그 상징성도 대단하다.

도시가 남긴 유산은 비단 유럽적인 것의 재탄생만이 아닌,

러시아인의 투쟁과 불굴의 의지, 절박함이 낳은 단결까지 포함해야 할 것 같다.


희생과 격동의 상트페테르부르크(출처: bangkokbook.ru)


* 커버 사진 출처: dzen.ru, culture.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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