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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Nov 02. 2016

유럽과 아시아 사이, 예카테린부르크

강인한 여인을 닮은 유럽풍의 도시

칙칙폭폭.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동에서 서로 참 오랜 시간 달려와 약간의 피로가 느껴질 즈음, 도시의 모습은 어느 새 조금씩 유럽의 옷을 갈아입고 있다. 말로만 수없이 들어온 '우랄 산맥'이 이제 코 앞이다.


러시아 여성의 이름 '예카테리나', 그리고 도시를 뜻하는 독일어 '부르크'가 합쳐진 이름 '예카테린부르크(Екатеринбург)'. 왠지 낯선 러시아 도시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처럼 유럽의 향기가 난다. 


이제 우리는 유라시아 대륙의 분기점에 도달한 것이다. 예카테린부르크의 분위기만으로 그런 직감이 든다.

밝은 유럽 느낌의 예카테린부르크 시내

하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역사도, 사람도 그 아름다움 뒤에는 늘 아픔과 인고의 시간이 존재한다.

러시아 여인만큼이나 매력적인 이 도시에는 과연 어떤 사연이 감추어졌길래 이리도 아름다워진걸까?




# 알고 보니 철과 무기의 도시?


지금까지의 도시가 다소 거칠었던(?)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예카테린부르크는 그냥 '예쁜 도시'라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한 표현 같다. 그런데 이 도시가 원래는 제철공장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가?


러시아 개혁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표트르 대제(1682~1725). 

엄밀히 말하자면 이 도시도 그의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의 관심사가 오직 '강한 러시아 만들기'이던 시절, 선박과 요새 건설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선철, 강철과 같은 광물 자원의 조달이 절실했고, 표트르는 우랄지역 광물 개발을 지시했다. 그렇게 이세티(Исеть) 강변에 제철공장이 세워지고 광산 도시가 만들어졌고, 그 이름은 표트르 대제의 부인 '예카테리나' 이름을 따게 되었다. 

예카테린부르크 기차역


서부 지역에는 '유럽을 향하는 창' 표트르의 도시(상트페테르부르크)가 있다면, 우랄 너머 동쪽에는 그의 부인 이름을 한 또 다른 도시(예카테린부르크)가 '아시아를 향하는 창'으로 있는 것이다. 

물론 둘 다 표트르 대제의 작품이다.

철과 혁명의 도시?

그렇게 예카테린부르크는 차츰 성장하여 우랄의 중심이 되었고, 러시아 혁명 시기에도 당시 공산당원 스베르들로프의 이름을 따 '스베르들롭스크'라고 한 때 도시 이름까지 바꿔가며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서부지역 산업시설들이 상당수 이 곳으로 옮겨왔고, 전쟁을 위한 각종 무기와 전투기 등 군수물자를 생산하면서 성공적인 승리를 이끌어냈다. 


지금의 예카테린부르크 모습만 보면 여기가 무기를 찍어낸 공장이었다는 사실은 도무지 믿을 수 없다.


철, 강한 러시아, 무기. 물론 다 지난 이야기긴 하지만 유럽의 예쁜 도시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이곳과는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과거는 있는 법이니까. 그냥 철의 여인이라고 불러줄까..?


대신, 지금의 도시를 100퍼센트 즐기기 위한 방법은 가까운 곳에서 찾을 수 있다. 

도시를 다니다 보면 아스팔트 바닥에 붉은색 라인이 그려있고 포인트마다 번호가 적혀있는데, 그 번호는 35까지 있다. 이른 바 레드라인(Red line) 프로젝트는 '가장 예카테린부르크다운' 명소 중심으로 걸어서 관광할 수 있는 보행 코스이다. 어디를 가야 할지 모르겠다면 무작정 이 빨간 선을 따라 6.5km 가량을 걸으면 된다.


과연 범상치 않은 도시가 맞긴 한가보다. 관광 라인도 혁명과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인 것을 보니.

레드 라인 주인공 중 하나. 가장 화려한 세바스티야노프의 집.


# 비극적 히스토리


여인의 이름을 한지라 얌전할 것만 같은 이 도시는 참으로 반전스럽고 사연 또한 많다.

예카테린부르크 하면 기억되어야 할 역사적인 순간이 있다. 이곳에서 제정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가 막을 내리게 되었다는 사실! 그것도 매우 비극적으로 말이다.


러시아 혁명이 터지고 내전이 심화되면서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는 소련군에게 체포되어 그의 가족 여섯 명과 함께 구금되었다. 당시 예카테린부르크 광산 기술자 이빠찌예프 집 지하에서 지내던 이들은 1918년 볼셰비키들에 의해 모두 총살당하고 만다. 참으로 영화에서나 볼 법한 비극적인 결말이다. 


< 아름다운 피의사원, 그리고 앞 정교회 십자가와 함께 서있는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가족들의 동상>


그 집이 있던 터에 2003년 피의 사원이 세워졌다. 

지금의 아름다운 모습 뒤에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피가 물들어 있는 것이다. 

피의 사원 내 니콜라이 2세 일가 사진들

피의 사원 앞에는 정교회 십자가와 황제 일가족 동상이 서있는데, 그 사연을 몰랐을 땐 그냥 사람이 많이 있는 동상으로 밖에 안보였지만, 알고 나서 다시 보니 괜시리 동상의 표정이 더욱 슬퍼보였고 숙연한 마음마저 든다. 


어렸을 때 "아나스타샤"라는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이국적인 러시아 이름인데다 예쁜 여자 아이가 나와서 큰 인기를 얻었다. 애니메이션의 내용은 다름 아닌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 딸 아나스타샤의 생존설을 소재로 한 이야기였다. 이제와 알고 보니 비극적 히스토리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으니 이 장소와도 무관하지 않겠구나 싶다.


아무튼 그 당시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은 무척이나 예뻤다. 닮고 싶을 정도로.


# 러시아다운 면모


예카테린부르크에 있을 당시 시내에 위치한 오네긴(Онегин) 호텔에서 머무른 적이 있다. 

호텔의 이름은 역시나 푸쉬킨 자신의 운명과도 같은 서사시 "예브게니 오네긴"의 주인공 이름이었다. 이름만 보면 왠지 클래식한 느낌의 건물에 있을 것만 같은데, 너무나 현대적이고 거대한 유리 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내부는 고풍스러우면서 안락한 분위기였다. 역시 러시아 건물은 겉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된다.

오네긴 호텔 앞 장난치는 친구들

호텔 근처 환경도 아이러니한 것이, 건너편으로는 삼위일체 성당이 있고그 옆에는 국제 무역센터 건물이 나란히 있다는 사실이다. 왠지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은 두 건축물이 한 라인에 있는 건 호텔의 유리 건물 속에서 찾은 클래식함과도 같은 이치다. 

이 마저도 그냥 '러시아스럽다'라고 밖에는.


무엇보다도 이 4성급 오네긴 호텔에서 감동한 것은 멋스러운 객실은 둘째 치고, 객실에 놓여있는 조그만 "예브게니 오네긴" 원어 책자였다. 보자마자 소장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는데, 이 호텔에서는 이 책을 투숙객들에게 선물로 제공하고 있다는 말에 신나게 챙겼다.

호텔에서 얻어온 예브게니 오네긴 책자 선물

호텔에서 주는 소책자 선물이라. 


물론 러시아어를 모르는 사람에겐 무용지물이겠지만 그래도 그 자체가 의미 있는 기억이다.


이런거에 감동한다. 그래서 난 러시아가 좋다. 

아이디어조차 참 러시아답다. 

문학을 사랑하는 나라!


# 유럽과 아시아, 그 사이 어디즈음


러시아는 유럽인가 아시아인가? 그 정체성에 대한 질문은 늘 있어왔다.

일반적으로 러시아의 문장 쌍두독수리 머리가 하나는 유럽을, 하나는 아시아를 향하고 있다고 해석한다. 

유럽인의 외모를 하고 아시아적 마인드를 가진 이 나라 사람들의 특수성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유라시아 대륙에 걸쳐있는 이 거대한 나라를 어떻게 단정지어서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예카테린부르크가 명쾌하게 거기에 대한 답을 주는 도시다. 


분명 유럽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확실한 선도 긋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가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예카테린부르크 기차역에서 유럽과 아시아를 구분하는 상징의 문이 말해주고 있듯.  

예카테린부르크 기차역에서 만난 유럽과 아시아의 문


예카테린부르크로부터 우랄 산맥  방향으로 조금 나가면 유라시아 분기점이라는 표식의 기념비들을 만날 수 있다. 그 분기점도 경계가 될만한 지역마다 세워져 있어서 몇 개나 되는지는 이야기하기도 어렵다. 

기념비도 에펠탑 모양, 비석 모양, 오벨리스크 등 다양하다. 

뻬르보우랄스크(Первоуральск) 지역 부근의 유라시아 분기점. 오벨리스크를 중심으로 유럽 방향


단지 분기점 기념비가 있는 장소가 대부분 인적이 드문 먼 교외 지역이라 일부러 작정하고 찾아가지 않고는 발걸음하기 좀 어렵기도 하다. 마땅한 교통편도 없어 택시를 잡아타고 가야 한다. 

힘들게 가도 기껏해야 기념사진 촬영하러 오는 신혼부부 정도 만날 수 있을까.

< 유라시아 분기점 아시아 방향에서 만난 신혼부부, 그리고 그곳에 남겨두고 온 소원리본 >


그래도 방문해볼만한 의미 있는 장소다. 

유라시아 분기점을 사이에 두고 아시아와 유럽을 오가는 인증샷을 찍는다면 그것이 작품이지 무어겠는가.

다행히 나는 유라시아 친선특급 당시 유라시아 분기점 중 한 곳을 방문하여 거기에 소망 리본을 남기고 왔으니 더 바랄 것도 없긴 하다.


이러한 분기점 표시는 어디랄것 없이 예카테린부르크 근교에서 경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다.


심지어 기차를 타고 가다 차창밖 무성한 숲에도 조그맣게 아시아와 유럽의 분기점이라고 적힌 비석이 발견되고 있으니. 유럽과 아시아 그 사이 어디즈음을 지나는 시점에, 바로 여기부터 어느 지역이라고 그렇게도 표시를 남겨놓고 싶었나 보다. 


마치 어렸을 때 땅따먹기 하면 내 땅에 별이든 달이든 가장 눈에 잘 뜨이는 걸 그려넣고 싶어한 것처럼 말이다. 

기차를 타고 가다보면 유럽과 아시아 분기점 기념비가 스치듯 지나가서 사진 찍기가 곤란할 정도다


러시아 도시들은 하나하나 뜯어보면 매력 덩어리이다.

사람은 자세히 보고 오래 봐야 예쁘듯, 도시도 그러하다.

지금의 아름답고 발전된 모습 뒤에 감추어진 또 다른 의미, 그리고 아픈 히스토리까지도 알고 나니 예카테린부르크가 더욱 새롭게 보인다.


커다란 연못, 산책로, 그리고 화려한 건물, 예쁜 야경. 그래서 첫인상이 좋았던 도시.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위치한 예카테린부르크는 참 러시아스러우면서도 강인한 여인을 닮은 멋진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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