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과 과학, 문화 예술이 번창한 시베리아의 보석
새로운 시베리아의 도시라는 뜻의 노보시비르스크(Новосибирск).
밑도 끝도 없이 성경의 이런 구절이 떠오른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린도후서5:17)
여기는 그런 곳이다. 척박한 시베리아 땅이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로 인구 백만의 대도시가 되어있다.
많은 이들이 시베리아!하면 아무 것도 없는 끝없는 벌판과 자작나무, 무릎까지 차오른 새하얀 눈만 떠올리지 않는가. 물론 겨울은 눈물이 얼어붙어버릴만큼 혹한의 시베리아 기후지만 여름까지 추울거란 생각은 그만. 여름에는 햇살이 뜨거워 타들어갈듯 덥기도 하다. 이토록 편견은 무섭다.
뭔가 새로운 것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은 노보시비르스크!
우리의 편견들은 이제 모두 안녕.
시베리아의 진주 바이칼 옆 이르쿠츠크에서 열차를 하루 타고 가면 도착하는 도시 노보시비르스크.
지금부터는 교통과 과학, 문화 예술이 함께하는 또 다른 보석을 양파껍질 까듯 하나씩 알아가보겠다.
어떻게 황량한 시베리아 땅에 이처럼 거대 도시가 세워질 수 있었던 걸까.
단연 오비강(река Обь)의 기적이라 일컬을만 하다.
알렉산드르 3세가 제정 러시아를 완성하고자 1891년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명령하였다. 그리고 1893년 이곳 오비강을 건너는 철도 교량을 놓기 위하여 많은 노동자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다. 강을 중심으로 그렇게 조그만 도시가 형성되었고 1903년 당시 니콜라이 황제의 이름을 딴 노보니콜라옙스크(Новониколаевск)는 지금 노보시비르스크의 시초가 되었다.
이처럼 철도는 노보시비르스크를 살린 생명줄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왔다. 처음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을 위해 조성된 도시로부터 시작됐으나, 철도가 만들어지고 나서는 그 길로 많은 이들이 텅 빈 시베리아로 이주해와 생활의 터전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지내면서도 서방의 공격을 피해 주요 공장과 산업시설을 이 철로를 통해 노보시비르스크로 옮겨와 발전의 기반을 마련했다. 길을 만들어 놓으니 삶이 생긴 것이다.
그밖에도 노보시비르스크는 지리적 위치상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모든 국제 철도 노선이 지나가는 분기점이 되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TSR), 몽골 종단철도(TMGR), 만주 횡단철도(TMR), 그리고 중앙아시아로 가는 투르케스탄-시베리아 철도(Turksib)까지 모두 이 도시를 지난다. 지하철도 2~3개 노선을 가진 역이 늘 사람들로 북적이듯, 이곳도 여러 열차들이 지나가니 교통의 요충지로 떠오르게 된 건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노보시비르스크는 철도 교통의 중심지답게 시내에 국립 교통대학이 있다. 대학의 교육관은 마치 그리스 신전을 형상하듯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규모가 엄청나다. 교통 없는 노보시비르스크는 앙꼬 없는 찐빵이니, 이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가를 육성하고 있는 것이다.
시내를 조금 벗어나면 다양한 열차들을 시기별로 구경할 수 있는 노보시비르스크 철도 박물관도 있다. 노보시비르스크=교통으로 이어지는걸 보면 이 도시도 선택과 집중을 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왠지 글을 쓰는 이 시점에서도 괜히 열차를 타고 싶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노보시비르스크가 교통의 도시라면, 회색 철에서 쇳내 폴폴 날리는 그런 도시인가?
그렇지 않다는게 반전이다.
처음 노보시비르스크 시내 모처에 떨구어졌을때, 나는 그저 눈 앞에 보이는 알록달록 꽃밭이 예뻐서 연신 사진을 박아댔다. 그러던 중 눈 앞에 펼쳐진 거대한 건물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뚜껑은 돔 모양으로 덮여있고 크기는 사진 구도가 한 화면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로 엄청났다.
알고보니 노보시비르스크 국립 오페라 발레 극장(Новосибирский театр оперы и балета)이었다. 이곳에 볼쇼이 극장이 들어갈만큼 훨씬 크다(большой).
규모만 최고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꽤나 유명한 공연으로 종종 내한했던 발레단이 여기 출신이었던 것이 기억났다. 이곳에서 유명 발레리나들을 배출해 볼쇼이 등 다른 곳에서 활약중이라고 한다.
우와, 그런 곳이구나. 모스크바까지 가지 않아도 최고 수준의 공연을 이 곳에서 볼 수 있겠다.
참. 그리고 오페라 발레 극장 앞 레닌 광장에는 레닌 동상들과 다른 소비에트 향기가 물씬 나는 동상들이 거대하게 서있는데, 왠지 그 포즈들을 따라하고 싶어진다. 극장 앞에 있어서 그런지 또 다른 예술 작품 사진도 하나 남겨야 할 것만 같다.
그리고 도시 곳곳을 산책하다 보면 크고 작은 다양한 극장, 영화관들이 보이는데, '어떻게 이런 곳에 극장이?'라는 생각이 들 만큼 뜻밖의 장소에서도 조우하게 된다.
그만큼 문화예술이 일상화되어있고 그 수준 또한 높으니, 산업 도시지만 인간 영혼의 숭고함만은 잊지 않으려는 이들의 노력이 엿보인다.
물론 문화적 차이라지만, 우리나라는 왜 이렇게 될 수 없는 것일까. 하는 아쉬움도.
우리나라의 대덕 연구단지의 모델을 뜻밖에도 이곳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시내에서 유배당하는(?) 기분이 드는 교외에 떨어져있지만, '작은 과학 도시'라는 뜻을 가진 '아카뎀고로독(Академгородок)'은 러시아에서 국가적으로 철저히 계획 도시로 건설한 연구단지이다.
시내에서는 30km 가량 떨어져 있는데다 숲이 우거진 곳이라 도대체 이런 곳에 뭐가 있는가 싶기도 하겠다.
지금의 러시아는 기운이 많이 꺾여있지만, 소련 당시의 과학 수준을 세계 일류로 끌어올린 원동력이 바로 이곳 아카뎀고로독이었다. 과학 도시를 조성하여 이 곳에 과학의 꽃을 활짝 피우게 된 것이다.
러시아의 뛰어난 과학 기술. 다 옛날 이야기라고들 하지만 그 전통만은 무시할 수 없다.
아카뎀고로독은 자연을 해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조성된 곳이라 이곳이 숲인지 연구단지인지 착각이 들기도 하지만, 역시 연구에 몰두하기 좋은 환경인 것만큼은 분명한 것 같다.
그곳을 벗어나지 않고도 모든 생활이 가능하다고 하니.
역시 큰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유배를 보내야 하는 것일까.
이곳은 그냥 시베리아가 아니다. "새로운" 시베리아의 도시이자 시베리아의 수도이다.
그러니 밭에서 눈이나 치우고 있을거란 생각은 집어치우도록(?) 하자.
시베리아 도시에 지하철이라니 당치 않은 이야기처럼 들린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도시에는 그 어디에도 지하철은 없었는걸?
그래도 노보시비르스크는 인구 천만 도시다. 지하철이 없는것이 더 이상하다.
비록 두 개의 노선에 역은 13개뿐이지만, 그래도 지하철이 있다 하니 왠지 미개지에서 신도시에 입성한 기분이다. 이리 뵈어도 시베리아에서는 최초의 지하철이라 하니 박수를 쳐주고 싶다.
우리나라처럼 대형 쇼핑몰도 많다.
요즘 한국에서는 쓸데없이(?) 유리 건물을 짓는 것이 트렌드인데, 노보시비르스크도 커다란 쇼핑몰이 대형 온실처럼 조성되어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대형 마트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너른 시베리아에 있어서 그런지 뭐든지 그 규모만큼은 화끈하게 만들었다.
그밖에도 트립어드바이저 순위권에 드는 노보시비르스크 동물원, 그곳 동물이 튀어나오는 것인지 시베리아 어딘가에서 조련해 온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동물들과 함께하는 대형 서커스도 있다.
그래. 시베리아라 야생동물 조달이 쉬우니까, 동물원과 서커스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알면 알수록 참 재밌고 신기한 도시다.
함께 발전하기엔 너무도 상충될 것 같은 교통, 과학, 그리고 예술. 하지만 이 모두가 높은 수준을 자랑한다.
그것도 시베리아인데 말이다!
우리는 늘 중심,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 큰 것에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세상에는 알고보면 몰랐던 주변의 그 어떤 것으로부터 더 큰 가치를 발견하기도 한다. 너도 나도 모르는 사이에 러시아 3대도시가 되어있는 노보시비르스크가 나에게는 그러했다.
러시아를 움직이는, 감추인 시베리아의 고품격 엔진과도 같은 곳.
지금의 나도 다른 이들이 알아보지 못한 나만의 보석을 발견해가는 중이다.
그렇게 모험소녀의 열차는 계속 이어진다. 시베리아 벌판을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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