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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May 17. 2018

잔돈 전쟁

나는 은행이 아니라구요!

러시아를 생각할 때마다 가끔 떠오르는 일화들이 있다. 

대부분 전공자적 시점에서는 당연하게 여기거나, 그저 사소한 해프닝으로 보는 것들이 부지기수. 

하지만 러시아 유경험자 누구나 가지게 되는 모험담, 재미있는 이야기 보따리가 얼마나 많던가! 


기억을 더듬어 하나씩 풀어볼까 한다.




러시아에서 살다 온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그 사이 러시아는 놀랄 만큼 발전하고 좋은 방향으로 변하고 있지만, 아직 그대로인 모습들도 여전히 있다.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 러시아! 유쾌하지만은 않았던 추억을 되새기게 해준다.


그곳에 갈때마다 알게 모르게 스트레스 받는 상황이 있다. 

내 의지대로 잘 되지 않아 평소 의식하고 신경을 써야 하는 부분인데, 그것은 바로....


돈! 러시아어로 젠기(деньги)! 
화폐는 그 유명한 루블(рубль)!

러시아 돈, 루블!

요즘은 다행히 러시아 가게와 레스토랑에서는 대부분 신용카드를 받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날 버릇 어디 안간다고, 나는 항상 현찰을 챙겨가는 편이다. 

이 사기꾼들이, 


«Аппарат не работает. 아빠랏 니 라보따엣» 
해석: 카드기가 안 돼요.


드라이하게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얘기하면서 돈으로 달라는 걸 내가 어디 한 두 번 겪어봤어야지! 

그래서 비상금은 필수였다.


러시아에서는 경제활동에서 예의, 에티켓이라는 건 구매자에게만 요구되는듯하다. 

가게에서 소액을 결제해야 하는데 부득이 1000루블이나 5000루블 같은 큰 돈을 내게 되면, 

이런 말이 메아리처럼 돌아온다.


«Поменьше? 빠멘셰»
해석: 더 작은 단위 돈은?


아니, 너희는 판매자가 아니더냐.... 도대체 왜 잔돈이 구비되지 않은 것이냐. 

러시아 직원이 나를 보며 작은 돈 안 주면 못팔겠다는식의 표정을 지을 때 솟구치는 황당함이란! 짜증도 나면서, 한편으론 잔돈 없는게 내탓인 것만 같아 급 송구스러워지까지 하는거 보면 나도 참 마음이 약한가 보다.


경제활동 현장. 이런곳은 상대적으로 잔돈이 많이 구비돼있다.


요즘은 그나마 나아져서 무기력한 표정 대신 다르게 대처하고 있었다. 

만약 지불액이 65루블인데, 내가 500루블을 냈다고 치자. 거스름돈 435루블을 나에게 줘야 하지만, 

점원은 이제 나를 보며 이렇게 묻는다.


«Пятнадцать будет? 삐뜨니짜찌 부짓»
 해석: 15루블 있어요?


마침 지갑에 있는 15루블을 주니 450루블을 거슬러 준다. 

자기들에게 있는 화폐 단위 기준으로 딱 떨어지게 손님에게 있는 잔돈을 요구하는 것. 헉... 머리 쓰네. 

계산을 한 번 더 하는 번거로움 속에서 나름대로 한정된 자원으로 애써 해결해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인다.


출처가 어딘지 궁금한 러시아의 계산서 케이스


러시아 마트나 식당에선 왜 잔돈을 많이 준비하지 않는걸까? 또 역으로 되묻고 싶은 것이, 그렇다면 도대체 5000루블처럼 큰 단위의 화폐는 왜, 누구를 위하여 만든걸까?


여전히 알 수 없다. 


누가 정기적으로 상점을 돌아다니며 작은 단위 화폐만 수거해 가는걸까. 아님 나처럼 큰 단위 화폐를 내는 고객이 하루에도 수십명이 오는걸까. 이런 생각까지 했었다.


언젠가 상트페테르부르크 모 카페에 갔다. 
커피와 마카롱 300루블어치를 기분 좋게 먹고 나서, 카드기가 안 된다기에 500루블을 낸 적이 있었다. 계산서에 분명 500루블 지폐를 끼워 종업원에게 건넸는데, 나중에 나에게 돌아온 것은.... 
엄청나게 뚱뚱해진 계산서 케이스!

나의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적당한 거스름돈이 없었는지, 지폐 대신 10루블, 5루블, 2루블, 1루블 동전만 총동원해 200루블을 만들어 준거다!!! 카페에서 이렇게도 많은 동전을 보유하고 있는게 신기할 정도였다. 다 챙겨가기에는 너무 무거워서 일부는 팁으로 그대로 놓고 나온 기억이 있다. 

잔돈이 없으면 좀 물어보던가!!!! 얼마나 미련하고 답답한지. 안쓰럽기까지 하다. 
나는 이렇게 보낸다지만 다음 손님들은 어떻게 거슬러주려고? 내가 남 걱정할 건 아니지만...
슬기로운 소비생활


이런 잔돈 전쟁은 아직까진 오롯이 구매자의 몫이랄까. 

그래서 현찰이 많을 것 같은 곳에 가면 무조건 큰 돈부터 깨는 습관이 생겼다. 잔돈 바꿔주는 기계는 없나? 

그런데 참 생각할수록 웃긴다. 내가 은행도 아닌데 돈을 내면서 전전긍긍해야 한다니! 

내 마음이 약해 그런걸까. 판매자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커서일까.


참고로, 이제는 대부분 러시아 상점에서 센트 같은 단위의 코페이카(копейка) 거래가 사라졌다. 오히려 줘도 받지 않는, 버려지는 돈이 되었다. 살짝 아쉽긴 하지만 지갑 수납 공간과 동전 정리 차원에선 고맙다. 한편, 가장 최근에 발행된 알록달록 200루블, 2000루블 신권은 아직 구경도 못해봤다.

끊는건 단숨에 잘하면서 새로운건 한참이 걸리다니. 

과연 러시아에서 화폐 순환이 제대로 되고 있기나 한건지!




자꾸 물음표만 늘어가는 나라지만 러시아는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곳이니까!


그냥 당하고 나면, 별 뜻 없이 피식 한 번 웃고 만다.
 
그러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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