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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Mar 12. 2018

러시아에서 '여성'은

여성의 날은 러시아에서 보내야!

러시아로 여행 간 어느 한국 여성의 이야기.

 

계단이 가파른 열차가 다소 위험해보였다. 올라 타려는데 앞에서 모르는 러시아 남성이 손을 내밀었다. 이건 뭐지? 넘어질것 같아서 얼떨결에 손을 잡고 올라왔다. 그는 내 짐까지 번쩍 들어다 주었다. 이 러시아 사람, 처음보는데 혹시  나한테 관심있나? ...........응? 그냥 쿨하게 가네....?


이런 경험은 다양한 형태로 누구에게나 있을 법하다. 러시아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사람의 외모(?)로 판단해 치한 아닌가 생각하거나 그냥 도움의 손길을 무시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러시아 남성은 여성 돕는 일을 당연하게 여긴다. 일부러 거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오, 러시아 사람 매너 좋네!' 하면서 도움 받고 "Спасибо 스빠시버(고맙습니다)"로 화답하면 된다.




러시아의 여성들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큰 전쟁들을 겪었고, 수많은 남성들이 전쟁에서 전사했다. 거기서 남게 된 여성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이어가야 했고, 힘겹게 가족을 먹여살려 나갔다. 굳은 일도 마다하지 않은 러시아 여인들이 누구보다 참을성 있고 강인함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 소련 냄새 나는 엽서. (사진 출처: m.sanurvolmaris.mypage.ru)

러시아는 모계사회 분위기가 다분하다. 가정에서도 남편보다 아내의 파워가 세고, 사회에서도 꽤 많은 간부, 공직 자리에서 여성들을 만날 수 있으니 말이다. 실제 러시아 사람들과 일해 본 나의 경험을 돌이켜 보면,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업무 능력이 뛰어났고 센스 있었다. 남성은 항상 뭔가 부족한 점이 드러나 최종에서는 매번 여성 직원이 채용됐었다.


아무튼 이렇게 러시아에선 여성이 늘 먼저이며, 여성을 배려한다. 그래서 너무 좋다! 물론 서방도 비슷하지만, 러시아도 예외 없다. "신사 숙녀 여러분"이 아니라 영어식처럼 "숙녀 신사 여러분(Дамы и господа)"이다.


문학에서도 여러 차례 여성형 명사 '대지(земля)'와 '러시아(Россия)'를 '어머니(мать)'에 비유해왔다. 넓은 마음을 가져 모든 죄를 용서해 줄 것만 같은 이 땅은 여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운명을 가졌다.


여성들을 위한 장미 한가득. 여성의 날! 꽃은 홀수로만 선물한다. (사진 출처: dagmintrud.ru)
여성의 날!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Международный женский день), 러시아도 어김없이 기념한다. 한국과는 달리 공식적인 휴일이다. 항상 봄은 여성의 날로 제일 먼저 시작한다고들 말한다.


"С 8 марта! С праздником!(3월 8일 여성의 날을 축하합니다!)"


여성이라 행복한 날 (사진 출처: www.vual.net)

여성의 날은 이런 메시지와 함께 아내, 딸, 엄마, 여동생, 누나처럼 가까운 가족뿐아니라 모든 여성들에게 '여성임을' 기쁘게 축하한다. 특히 러시아 여성들은 꽃을 좋아해 누구나 꽃 선물이 어색하지 않다. 여성이라면 누구나 축하받을 수 있는 1년에 한 번 있는 이 날, 얼마나 행복할까? 그래서 여성의 날만큼은 한국보다 러시아에 있는 편이 좋겠다. 여성인 나를 모두가 알아주고, 다 함께 축복해줄 수 있으니 말이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전쟁에서 희생된 수많은 조국 수호자들을 기리는 소위 남성의 날(День защитника Отечества)도 있다. 여성의 날보다 이른 2월 23일 아쉽게도 아직 추울 때다. 전쟁 당시 전사한 이들을 추모하며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Вечный огонь)은 지금도 도시 곳곳에서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 러시아인들의 춥게 얼어붙었던 마음, 봄이 오는 문턱에서 녹이고 여성의 날을 시작으로 한 해를 또 힘차게 살아가길!


남성들을 위한 꺼지지 않는 영원의 불꽃!


2018년 대선을 앞두고 있는 푸틴 대통령의 여성의 날 기념사를 보게 되었다. 그의 언변, 감정을 담되 절도 있는 말투는 가히 카리스마 넘친다. 이러저러한 문제가 있다고 떠들어댄들, 이날 3분 가량의 짧은 영상 하나만으로 모두의 마음을 녹였을 것 같다. 물론 맘속으론 18일 대선을 노리고 있었겠지만.


2018년 3월 8일 푸틴의 여성의날 축하 연설(출처: www.ntv.ru)


내게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기념사 말미에 여성과 관련된 시를 하나 읊었다는 사실이다. 이마저도 지극히 러시아적이라 놀라웠다.


안드레이 제멘찌예프라는 노시인의 2003년 시인데, 궁금해서 한 번 번역해 보았다.

물론 저자의 원래 의도를 다 담지는 못했겠지만 여성을 참 대단한 존재로 생각해주는구나, 느껴진다. 요즘처럼 미투로 한창 시끄러운 한국에서도 이런 정서들이 생겨났으면!



Я знаю, что все женщины прекрасны.

나는 알지, 모든 여성들이 참으로 훌륭하단 걸.

И красотой своею и умом.

그 아름다움으로, 그 지혜로.

Еще весельем, если в доме праздник.

그리고 즐거움으로, 집안 행사에서는.

И верностью, – когда разлука в нем.

또 성심으로, 함께 하지 못할 때라도.

Не их наряды или профиль римский, —

그들의 옷차림이나 조각같은 얼굴보단,

Нас покоряет женская душа.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은 여성의 마음.

И молодость ее…

또 그녀의 청춘...

И материнство,

그리고 모성,

И седина, когда пора пришла.

거기다 때 되면 찾아드는 백발까지.

Покуда жив, – я им молиться буду.

살아있는 동안, 나는 그들을 숭배하리.

Любовь иным восторгам предпочту.

사랑을 다른 어떤 기쁨보다도 먼저 선택하리.

Господь явил нам женщину, как чудо,

주님은 우리에게 여성을 보내주셨지, 기적처럼,

Доверив миру эту красоту.

세상에 이 아름다움을 맡기시고서.

И повелел нам рядом жить достойно.

그리고 우리에게 그들 곁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라 명령하셨네.

По рыцарски – и щедро, и светло.

기사도 정신으로 그렇게 너그럽고, 밝게.

Чтоб души наши миновали войны

우리 영혼을 전쟁에서 면케 하려면

И в сердце не закрадывалось зло.

마음 속에도 악이 채워져선 안 된다네.

И мы – мужчины – кланяемся низко

또 우리 남성들은 머리 숙여 인사하리,

Всем женщинам родной земли моей.

내 조국 땅의 모든 여성들에게.  

Недаром на солдатских обелисках

그런 이유로 전사의 기념탑 위엔

Чеканит память лики матерей.

어머니의 얼굴이 새겨져 있구나.


                                                                                               - Андрей Дементьев(2003)

                                                                                                 안드레이 제멘찌예프(2003)


★ 게재된 사진 일부의 저작권은 저자(모험소녀)에게, 일부는 인터넷(출처 명시)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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