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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소녀 Jun 05. 2018

모스크바발 2층 야간열차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 2층 열차 체험기

러시아에 왔다면 대륙을 달리는 기분 한 번 느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차원에서 짧게라도 러시아 열차를 타보기를 권한다. 선택권은 다양하다.


완행 열차, 고속 열차, 2층 열차…


나는 이중에서 한 번도 못타본 2층 열차(Двухэтажные вагоны)가 늘 궁금했다. 유럽에서 좌식 2층 열차는 타봤어도 침대칸은 어떨까? 2층 객실에 누워 가면 붕 뜬 기분일까? 왠지 잠이 더 잘 올 것 같기도 하다. 


2층 열차 노선은 대부분 모스크바 출발-도착 구간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카잔, 사마라, 보로네쉬 등까지도 운행되고 있다. 

난 가장 보편적인 모스크바발 상트페테르부르크행 2층 야간열차를 타보기로 했다. 


아래층은 플랫폼보다 조금 아래에 있고, 위층은 천장까지 올라오는 2층 열차


물론 4시간이면 가는 고속 열차(САПСАН 삽산)도 있지만, 열차 여행의 백미는 침대칸 아니겠는가?

2층 열차는 층이 두 개라 일반 열차보다 수용 인원이 많다. 시설은 최신식, 객실은 3등석(плацкартный 쁠라쯔까르뜨니) 없이 대부분 4인실 쿠페다. 가격은 시기에 따라 3~6만원대(편도). 물론 미리 살수록 저렴해진다.




나는 계획에도 없는 즉흥 여행중이었다.
예매? 이런 거 없다.


열차표는 인터넷으로 가격 확인 후, 아직도 옛이름을 간직한 레닌그라드 기차역에 가서 직접 사기로 했다. 

[서울엔 서울역이 있지만, 모스크바엔 모스크바 역이 없다! 행선지가 곧 역 이름이다.]


인터넷도 제대로 안 되던 시절 더듬더듬 러시아어로 직원에게 혼나가며 겨우겨우 표를 사던 추억이 떠오른다.


모스크바에 있는 레닌그라드(상트페테르부르크 행) 노란 기차역, 그리고 내부


지금은 놀랍게도 줄을 서지 않고 매표소 입구에서 번호표를 뽑게 되어있다. 모니터에 '딩동' 소리와 함께 내 번호와 창구 번호가 뜨니, 감사하게도 줄을 잘못서서 한탄할 일은 없다. 


발전된 환경과 달리 매표소의 아주머니는 여전히 무표정이시다.

그분께 목적지, 시간대, 좌석 등 나의 주장을 자유로이 펼친 후, 돌아오는 몇 마디 물음에 답하고 여권과 돈을 내니 간단히 발권 끝. 아쉽게도 내가 기대한 금박 붙은 간지 티켓은 아니었다.

2층 열차 현장구매 티켓. 금박은 아니네..


아래층이 위층보다 500루블 정도 비쌌다. 운동 삼아 오르내리자며 불편한대로 그냥 위층을 선택했다. 

[가격 차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유가 확연했다.]


기왕 타는거니 2층 객실 위층에 타서 열차 가장 높은 곳의 공기를 마시며 가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타는 차편은 밤 9시 50분에 모스크바를 출발해 다음날 새벽 6시 26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는 8시간 반 여정의 2층 열차였다. 2층 열차는 거의 매일 운행되는데, 그중에서도 뭔지 모를 고유명사 붙은  <스메나-베탄쿠르(Смена-А. Бетанкур)> 26번 기차를 타게 됐다. 처음엔 그냥 회사 이름인가 싶었다.


밤 기차는 혼자서도 몇 번을 타봤지만, 2층 열차라니 설렜다. 열차가 어떻게 생겼나, 같은 칸엔 누가 탈까 궁금하기도 했다. 플랫폼 번호가 떴고, 난 서둘러 움직였다. 


그런데....헉! 

동시에 중국 관광객 단체가 대거 엄청난 소음과 함께 뒤를 따라오는게 아닌가?!

[제발 같은 기차가 아니길, 최소한 같은 객차는 아니길!]


다행히 그들은 나에게서 멀어졌다.[휴] 

중국 관광객들은 피했는데 뭔가 좀 이상하다? 


내가 탈 객차 대기자들이 모두 러시아 남성들이 아닌가? 이건 남성칸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여성 동무가 한 명도 없었다. 이건 뭐.... 갑자기 영혼 없이 발권하던 매표소 아주머니가 생각나 괜히 원망스러웠다.


여행가방을 힘겹게 2층까지 들고 올라갔다. 계단이 생각보다 많다. 

그 많던 아저씨들 다 어디 가셨나... 나 좀 도와주시지는. 


2층 야간열차 내부: 플랫폼보다 낮게 위치한 아래층 복도(좌) 계단 타고 오르면 나오는 위층 복도(우)


열차는 참 깨끗했다. 객실을 둘러보던중 할아버지가 들어오신다. 우리는 제대로 인사할 틈 없이 각자의 짐을 좌석 밑에 넣었고, 접혀있는 아래층 의자를 펴보려고 함께 안간힘을 썼다. 아마도 할배도 이 열차는 처음이신가보다. 결국 낑낑대는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어떤 아저씨가 와서 좌석 내리는 법을 알려준다.

[역시 츤데레 러시아 아저씨, 감사]


2층 야간열차 내부: 쿠페 객실(좌) 아래층에 위치한 화장실 나란히 세 칸(우)


할아버지는 아래칸이었고 난 건너편 위칸이었다. 다른 아저씨도 있었는데, 일행이 있는 방으로 옮기셨다. 음, 정녕 여긴 남성 객차였단 말인가.

위층은 천장이 낮아 누워있을 수밖에 없다.


결국 할아버지와 나만 남았다. 아내 분과 일상적인 통화를 하시는 동안 나는 내 자리로 올라갔다. 그런데...!!! 천장이 낮아서 앉아있을 수 없었다. 이때 500루블 차이를 제대로 실감했다.


때마침 차장이 와서 간식과 먹거리를 배급한다. [역시 비싼 열차는 다르군!] 

늦은 시간에 먹고 바로 자도 그렇고, 너무 피곤했던지라 나는 그냥 앉지도 못하는 내 자리에 드러누워버렸다. 


간단한 간식이 제공되는 2층 열차


할아버지도 주섬주섬 충전기가 없다며 본인의 아이폰 충전을 포기하면서 자리에 누우신다.

[헛, 할아버지가 아이폰이라니! 충전기를 빌려드리려 하였으나 할아버지 건 옛날 모델이라 맞지 않았다.] 


조심스레 여쭈어보니 오늘 하루가 '고됐다'시며 잠을 청하겠다 하신다. 나는 대답을 듣자마자 앗싸리 바로 불을 껐고, 그렇게 고요하게 차장이 깨우러 오는 새벽까지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이웃을 잘못 만났으면 잠도 제대로 못잤을텐데.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덕분에 짧지만 즐거운 2층 열차 체험이었어요!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흐렸고, 기차역은 한창 공사중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모스크바 기차역 플랫폼



2층 열차 안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면서 난 복도에 붙은 글을 보고 열차 이름의 실체를 알게 됐다.
열차의 '베탄쿠르'는 18세기말 19세기 초 스페인 출신의 러시아 육군중장 이름이었다. 그는 제정 러시아 엔지니어로서 수로 시스템을 혁신적으로 바꾼 인물이다. 무엇보다 베탄쿠르는 상트페테르부르크 이삭 성당 건축에 참여했고, 목재 구조물로 기둥을 세워올리는 메커니즘을 개발한 것으로 유명하다. 궁전 광장에 상징적으로 솟아있는 알렉산드르 원주 기둥도 그가 1832년 올린 작품이라고.
베탄쿠르 압구스틴(출처: peoples.ru)


이렇게 열차도 타고 지식도 살지는 여행은 처음이다. 

역시 가만히 있는 것보다 


어디든 빨빨거리며 다녀야
뭐라도 하나 건지겠구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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